
바보 왕자님의 사랑 이야기
*들렘 합작-'미성숙' 주제로 참여합니다.
그 학생 빨리 깨워서 데려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가게 주인이 주방으로 들어가며 크게 소리쳤다. 민희는 테이블 위에 상체를 반쯤 눕힌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갈색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새벽도 아니고 대낮부터 알코올 때려 붓기라니. 예상하고 온 거였지만 직접 보니 꼴이 가관이었다.
"그만 마셔, 송형준."
"어라. 술잔이 멋대로 움직여……."
형준의 앞에 놓여있던 술잔을 홱 가로챈 민희는 말꼬리 질질 늘리며 헛소리를 해대는 형준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단단히 취했네, 얘. 혼자서 소주 두 병을 깐 형준은 눈이 죄다 풀려있었다. 울다가 그치기를 반복한 얼굴에는 눈물 자국도 선명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술잔을 향해 미적미적 손을 뻗는 형준을 한 손으로 제지한 민희가 술집 벽면에 걸려 있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2시 43분. 이미 강의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난 시각이었다. 지금 당장 돌아간다고 해도 교수한테 욕이나 얻어먹고 결석 처리 받을 게 뻔했다.
고로. 민희는 오늘 형준 때문에 수업을 통으로 쨌다.
w. 말랑콩떡
이렇게 되면 어쩌다가 송형준은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고 있었으며, 강민희는 왜 강의까지 제쳐두고 형준을 찾으러 왔는지 그 인과관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발단은 이러했다. 형준은 얼마 전 수강 신청 실패로 듣게 된 ‘지구와 환경 문제’ 라는 교양에서 만난 공대 선배한테 반했다. 그 선배는 키가 크고, 잘생기고, 무려 매너까지 좋다고 했다. 민희는 그 시간에 다른 강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선배를―형준이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 보여줘서 대충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만―직접 본 적은 없었다. 형준이 눈이 낮은 편은 아니니 아마 꽤 괜찮은 사람일 거라 어림짐작하는 게 다였다. 형준은 한동안 사랑에 빠진 바보가 돼서 매일 그 교양 강의가 있는 수요일만 기다리며 지냈다. 드디어 진정한 사랑을 찾은 것 같다며 조만간 그 선배 번호 딸 거라고 네이버 검색창에 ‘자연스럽게 남자 번호 따는 법’ 이딴 거나 검색했다.
그러다가 오늘에서야 사단이 터졌다. 그 선배에게는 3년을 사귄, 심지어 군대까지 기다려준 오래된 여자친구가 있었다. 짝사랑 선배 인스타 염탐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형준은 오후 강의도 다 뒤로하고 혼자 밥집 가서 낮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오전 수업 듣고 전공 강의 들으러 간 민희는 형준이 수업 시작 시간 임박하도록 강의실에 들어오지 않는 걸 알아채자마자 가방 들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형준은 학점 관리는 안 할지언정 수업을 빠지는 애는 아니었다. 형준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건 필히, 그놈의 알량한 짝사랑에 무슨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대강 넘겨짚는 건 가능했다. 그 선배라는 사람한테 애인이 생겼거나, 이미 사귀는 중인 애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됐거나. 민희는 언덕길을 뛰어 내려가며 작게 욕을 짓씹었다. 이번엔 또 어느 쪽인데, 송형준.
아는 학교 앞 술집이란 술집은 다 돌다가 겨우 형준을 발견한 곳은 학생들이 싼 맛에 자주 가는 김치찌개 집이었다. 창문 밖으로 익숙한 뒤통수가 보여 급하게 뛰어 들어가 보니 형준은 이미 술에 취해서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다행인 점은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이어서인지 가게 안에 있는 손님이 형준뿐이라는 것이었다. 형준에게 '점심부터 청승맞게 질질 울면서 술 마시던 갈색 푸들 머리 학생' 따위의 수식어라도 붙었다간 자퇴 말렸을 테니까. 물론 송형준 말고 강민희가.
"진짜 많이 좋아했는데……."
"……."
"민희야, 있잖아. 나한테 결말은 죄다 새드엔딩 같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축축했다. 민희는 얼마 전 다시 까맣게 염색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 새드엔딩일 거 뻔한 짝사랑 좀 그만하라고. 마지막 사랑이라도 만난 것처럼 들떴다가 십 년 사귄 애인한테 배신당한 사람처럼 우는 거 이젠 질릴 때도 되지 않았냐고. 형준을 향해 한바탕 쏟아내려던 말들을 그냥 목구멍 뒤로 삼켰다. 이미 울었던 애를 또 울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못 할 짓이었다.
사실 형준에게 사랑은 버릇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정 자체가 거짓인 건 아니었지만 형준은 사랑을 하지 않으면 꼭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동안은 허하거나 텅 빈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새가 없어서 좋다고 했다.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상대가 왜 맨날 만난 지 얼마 안 됐거나 처음 본 사람이냐고. 그것도 꼭 뼈테로여서 죽었다 깨어나도 형준 본인을 좋아할 일은 없는 남자만 골라서. 이 정도면 망한 주식 콜렉터였다. 마음 주는 건 헤픈 주제에 송형준이 연애 한 번 못해 본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만 울고 일어나. 데려다줄 테니까."
형준의 가방을 홱 가로채듯 집어 든 민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준은 멍하니 민희를 올려다보다가 후드티 소매를 죽 당겨 꾹꾹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찍어냈다. 회색 후드티 소매 부분이 짙은 검은색처럼 보일 정도로 눈물에 푹 젖어 있었다. 테이블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형준이 휘청거렸다. 놀란 민희가 형준의 양어깨를 쥐고 몸을 지탱했다.
"뭐야, 너 왜 이래."
"……민희야."
"어지러워?"
나……다리에 힘이 없어. 형준이 다 짓무른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민희는 낮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누군 놀라서 심장 내려앉는 줄 알았는데 웃기는 뭘 웃어.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 대충 팔에 걸친 민희가 형준의 앞으로 가 무릎을 접어 앉았다. 업혀, 얼른. 집 가게.
대낮부터 술 취한 남자 업고 돌아다녔더니 여기저기서 시선이 몰렸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민희와 형준을 두어 번씩 흘끗흘끗 돌아봤다. 잠시 형준을 바닥에 내려놓은 민희가 자신이 쓰고 있던 캡 모자를 벗어 형준의 머리 위에 씌웠다. 형준이 불편하다며 칭얼거렸다. 민희는 캡모자를 더 푹 눌러 씌우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디 가서 강의 째고 낮술 했다는 소리 듣기 싫으면 그냥 써.
액체처럼 흐느적거리는 형준을 다시 들쳐 업었다. 등짝에 딱 달라붙은 온도가 뜨끈했다. 주량이 소주 반병 맥주 두 캔밖에 안 되는 주제에 안주도 없이 소주 두 병을 비웠으니 상태가 어떨지는 알만 했다. 민희는 코알라처럼 제 등에 매달려 있는 형준을 고쳐 업으며 형준의 자취방 근처 편의점에 들러 숙취 해소제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분명 속이 쓰리다고 학교에서 하루 종일 끙끙 앓을 게 눈에 훤했다.
"민희야."
"왜."
"너 이럴 때 진짜 동화 속 왕자님 같아."
"뭔 소리야 그건."
"나 울고 있을 때마다 맨날 찾아오잖아."
내가 왕자면 너는 공주냐. 그렇게 따져 물으려다 그냥 관뒀다. 동화 같은 속 편한 소리 하기는. 뒤에서 형준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업고 있는 당사자는 힘들어 죽겠는데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어댔다. 야야, 그러다 떨어져. 움직이지 마. 타박하듯 말하자 그제야 움직임이 멎는다. 미아냉. 눈물 콧물 다 쏟으면서 울었던 탓인지 코맹맹이 소리가 섞여 있는 목소리로 형준이 사과했다.
형준은 꼭 덜 자란 어린 애 같았다. 다른 누군가한테 애정을 갈구하는 것도, 그 상대를 시도 때도 없이 바꾸는 것도. 형준은 외로움도 많이 타고 상처도 잘 받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못 견뎠다. 미움받는 건 극도로 싫어했다. 몸은 다 자랐지만 머리는 덜 자란 어린 애. 쉽게 말하자면 그런 거였다.
"다음부턴 안 올 거니까 혼자 술 퍼마시고 우는 짓 좀 관둬."
"거짓말. 올 거면서."
큭큭 소리까지 내가며 웃는 게 한편으로는 얄미우면서도 또 기분이 공중에서 부유하듯 붕 떴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눈두덩은 퉁퉁 부은 주제에 코를 찡긋거리며 웃고 있을 것이다. 이젠 직접 보고 있지 않아도 형준이 웃는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 정도면 중증이었다.
"고마워, 민희야. 너밖에 없다 진짜."
"됐으니까 집 도착할 때까지 잠이나 자."
"나 너 없으면 어떻게 살지……."
형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졸린 건지 목덜미에 고개를 묻더니 금세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제 귀 끝도 전력 질주하고 난 뒤처럼 요란하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도 형준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너 자꾸 그런 말 하지 마.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옆에서 형준을 지켜봐 왔기 때문에 알았다. 농담처럼 툭 던진 한마디에 기대하고 설레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그 기대가 크면 클수록 상처의 크기도 커진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송형준 너. 자꾸 그런 말 하지 마. 너 없으면 어떻게 사냐는 말 같은 거.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기대감을 오늘도 모른 척 외면했다. 우리는 이게 나아. 지금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야. 비겁하고 궁색한 변명일지도 몰랐다. 사실은, 두렵기 때문이었다. 형준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 상황이 깨지는 게. 그 무엇보다 두려워서.
***
"이게 누구야. 송형준 껌딱지 아냐?"
아, 젠장. 민희가 속으로 작게 욕을 곱씹었다. 형준과 강의 끝나는 시간이 맞지 않는 날이라 과실에서 휴대폰이나 들여다보며 시간을 때울 참이었건만. 하필 과실 안에 지훈이 있었다. 졸업도 안 하나 저 인간은. 과실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서 두툼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게 꼴 보기가 싫었다. 저 입에 송형준 이름 세 글자 오르내리는 것마저 짜증났다. 오티 때 형준과 지훈이 한 조로 엮였던 게 문제였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아예 모른 척 쌩 까고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같이 안 오네? 웬일이냐?"
"여기서 기다리려고요."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꾸한 민희가 지훈이 앉아 있는 의자와 가장 멀찍이 떨어진 소파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네는 남자 새끼들끼리 징그럽게 잘 붙어 다닌다? 여자애들도 아니고. 눈을 가늘게 뜨고 민희를 흘겨보던 지훈이 시비조로 말하며 낄낄거렸다.
"아, 선배도 참. 붙어 다닌다고 여자애들 같다고 하는 거 너무 낡은 사고방식 아니에요? 보기만 좋구만."
지훈보다 한 학번 아래인 수현이 타박하듯 말하자 지훈이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후배한테 지적을 당한 게 멋쩍은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희는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훈이 뭐라 하든 관심 가져줄 이유는 눈곱만큼도 없는 데다가, 어차피 곧 있으면 형준의 강의가 끝날 시간이다. 형준이 도착하면 바로 과실을 나가서 점심이나 먹으러 갈 생각이었다.
"근데 송형준 걔……보면 볼수록 존나 게이 새끼 같지 않냐?"
지훈이 두툼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민희를 바라보았다. 당사자 친구 앞에서 당당하게 뒷담 까는 지훈의 인성에 경악한 듯 찬물 끼얹은 것처럼 과실이 조용해졌다.
"야, 강민희. 넌 맨날 걔랑 붙어 있는데 못 느껴?"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성격대로라면 입 함부로 털고 다니지 말라고 한마디 했겠지만 꾹 눌러 참았다. 선후배 간의 예의 뭐 이런 것 때문은 아니었고 여기서 나섰다가 괜히 지훈이 형준에 대해 더 쉽게 얘기하고 다닐까 봐. 과실에 있던 다른 학생들도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지훈의 눈치를 봤다. 알 사람들은 다 알았다. 경영학과 미친 개또라이 김지훈. 성질 건드려 봐야 좋을 일 없다는 걸 모르는 바보는 없었다.
"애가 귀엽게 생기긴 했는데, 뭔가 좀 거부감 들어. 막 아무한테나 애교 부리고 그럴 땐."
분위기를 읽어낼 줄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여기서 제일 고학번이니 딱히 분위기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못 하는 건지, 검지로 안경을 치켜올리며 지훈이 과실이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기름기가 잔뜩 낀 듯한 음성이 귀에 거슬렸다. 할 수만 있다면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민희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나 좀만 있으면 과실 도착해. 형준이 약 2분 전에 보내온 메시지 창이 띄워져 있었다.
"나한테도 자꾸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들러붙더라고, 저번 개강 총회 때."
아, 더는 못 들어주겠네. 묵묵히 지훈이 하는 얘기를 듣고만 있던 민희가 고개를 들어 삐딱하게 지훈을 쳐다보았다. 민희에게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지훈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애초에 남 뒷담 까는 걸 인생의 낙쯤으로 여기는 너절한 인간이고, 그가 누굴 욕하든 민희와는 일절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그 뒷담 까는 대상이 형준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더해서 형준과 민희가 허구한 날 붙어 다니는 걸 알면서도 저런 식으로 떠들어댄다는 건 분명 민희의 속을 긁을 목적도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동기들처럼 지훈에게 무조건 굽히고 들어가거나 살갑게 구는 편이 아닌 민희를 지훈이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민희도 잘 알고 있었다. 지훈은 평소에도 민희에게 유감이 있다는 것을 일부러 티 내면 티 냈지 숨기지는 않았다. 눈치 없는 형준의 눈에도 그게 뻔히 보였는지 지훈 앞에서만큼은 잘 웃고 대답도 꼬박꼬박하라고 민희를 걱정할 정도였으니.
천천히 숨을 삼킨 민희가 휴대폰 상단바를 손가락으로 끌어내려 시간을 확인했다. 형준이 과실에 거의 다 왔을 시간이었다. 민희가 소파 옆에 내려놓았던 백팩을 집어 들었다. 지훈이 짖어대는 걸 계속 들어주고 있을 바에는 밖에 나가서 형준을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괜히 형준이 저 찾으러 과실 들어 왔다가 저질스러운 험담을 듣게 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민희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작작 하라고 말해봤자 들어 처먹을 인간도 아니고 더 이상 말을 섞는 것도 싫었다. 앞으로는 송형준 데리고 과실 절대 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민희가 몸을 일으키던 찰나였다. 비아냥 섞인 말투로 지훈이 중얼대듯 말했다.
"애가 헤퍼 보인다고 해야 되나. 아무튼, 좀 소름 돋아. 하는 짓 보면."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친 지훈이 입술을 비죽대며 민희를 바라보았다. ……저 개새끼가. 입속으로 욕을 뇌까린 민희가 눈동자를 사납게 치켜떴다. 저기요, 선배.
"송형준 눈 높아요."
"뭐?"
"송형준이 설령 게이라고 해도 선배 같은 안경 돼지남 좋아할 일은 없을 테니까."
주제 파악 좀 하시라고. 민희가 나직하게 마지막 말을 덧붙이자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지훈의 동기들을 포함한 과실에서 다음 강의까지 시간을 때우던 사람들 모두 놀란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까마득한 후배인 민희가 사람으로 꽉 찬 과실에서 대놓고 지훈을 깠다. 말 그대로 누군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많은 후배들 앞에서 한순간 우스운 꼴이 됐다고 생각했는지 지훈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이게 선배한테 주제 파악? 너 말 다 했냐?"
"선배? 선배답게 굴어야 선배 취급을 해주지."
민희가 빈정거렸다. 꽉 쥔 지훈의 주먹이 파들파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민희에게 달려들 태세였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듯하던 지훈이 멈칫하더니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살폈다. 드디어 분위기를 읽는 눈치였다. 침묵이 길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핏발이 선 눈을 부릅뜨던 지훈이 난데없이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민희가 미간을 팍 좁혔다. 뭐야, 저 새끼가 미쳤나.
"아아―."
"……"
"너도 게이냐?"
“…….”
"너 맨날 송형준 따라다니잖아. 하, 맞네! 너 송형준 좋아하냐? 그래서 지금 송형준 욕하니까 열 받은 거고?”
지훈이 이죽거리며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민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방 먹였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훈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진짜였네.
"너 걔한테 뒤통수 안 맞게 조심해라. 거의 송형준 부모 노릇 하던데. 송형준 걔가 너 모르는 사이에 다른 놈들한테 뒤 대주고 다니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공들여 놓은 거 누가 먼저 홀라당 벗겨 먹으면 존나 열 받잖아. 지훈이 킬킬대며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가 끊기기 직전.
쾅―!
지훈이 앉아 있던 의자가 옆으로 넘어지며 큰 소음을 냈다. 민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훈의 멱살을 쥔 탓이었다. 불과 몇 초 안에 일어난 사태에 놀란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야, 강민희 진정해! 이름조차 잘 모르는 동기 한 명이 민희의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지훈은 숨이 막히는지 컥컥 기침을 토하며 민희의 손을 떼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지훈의 멱살을 더 꽉 쥔 민희가 시퍼렇게 뜬 눈으로 그 동기를 노려보았다. 이 새끼가 입을 이따위로 터는데 진정하라고, 나 보고? 민희가 잡아먹을 듯 묻자 동기가 입을 다물었다. 고학번 선배들이 민희를 지훈에게서 떼어내려 해봤지만 이미 눈이 뒤집힌 민희에게 누구도 쉬이 다가서지 못했다.
"다시 지껄여봐."
"컥……커헉, 억!"
"송형준이 뭐?"
민희는 단단히 꼭지가 돌아버렸다. 당연했다. 형준이 마음 주는 건 헤플지언정 스물여섯 처먹어 놓고 할 줄 아는 건 저급한 농담 따먹기밖엔 없는 새끼한테서 뒷담 까일 이유는 없었다. 지훈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에 담긴 저열한 의도가 역겨워서 분노가 치밀었다. 제 성질 한번 긁어 보겠다고 형준을 깎아내리는 게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형준은 바보 같을 정도로 순해 빠진 애였다. 잘 삐치고 눈치는 없어도 보는 사람이 답답해질 만큼 착했다. 아마 형준은 지금 제 옆에서 지훈의 말을 듣고 있었더라도 한마디도 못 한 채 에이 선배 왜 그러세요, 하며 실실 웃어넘겼을 게 뻔했다. 속이 다 상해서 문드러지더라도 겉으로는 티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남이 제 기분을 상하게 하더라도 똑같이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은 절대 못 하는 애니까. 걔는 그 정도로 바보니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몰렸다. 마음 같아선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엿 같은 면상에 주먹을 꽂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가 뭔데 송형준에 대해 함부로 말해. 네가 송형준에 대해 뭘 아는데.
"강민희……!"
그때였다.
하도 들어 익숙하다 못해 본능처럼 반응하게 되는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민희가 멈칫한 사이 지훈의 멱살을 잡고 있던 민희의 손 위로 손바닥이 덮였다. 온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형준의 손이었다. 민희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귀 끝이 새빨개진 형준이 울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송형준."
"그만……그만해."
형준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민희의 손에서 힘이 탁 풀렸다. 숨이 막힌 듯 눈을 반쯤 까뒤집고 있던 지훈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컥컥 기침 소리를 냈지만 민희는 지훈을 향해서는 잠시도 시선을 주지 않고 형준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는 과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숨죽인 채 민희와 형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희의 손등을 붙들고 있는 형준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 떨림이 민희의 피부 위로도 전해졌다.
"나가자 제발."
민희는 속삭이듯 말하는 형준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씨발. 짓씹듯 욕을 내뱉은 민희가 그대로 형준을 데리고 과실을 빠져나갔다.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상경관 뒷문을 통해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온 민희가 꽉 쥐고 있던 형준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형준은 발개진 눈을 깜빡이며 숨을 골랐다. 필사적으로 우는 걸 참아내고 있는 것처럼. 민희가 볼 안쪽 살을 강하게 씹었다. 모든 게 다 꼬여버렸다.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던 형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표정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다 들었을까. 다 들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심장과 목구멍이 한계까지 조여드는 것 같았다.
"너 어디서부터 들었어.”
형준은 잠시 말이 없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그게 중요해? 너 왜 그랬어. 괜히 선배한테 밉보였다가…….“
……다 들은 거지, 너. 말허리를 자르며 묻자 형준이 입술을 고집스레 다물었다. 민희는 착잡한 심정으로 아랫입술을 꽉 물어 짓이겼다. 고개를 푹 숙인 형준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며 민희의 눈치를 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화가 났다. 지훈이 하는 말을 들었다면 본인도 상처받았을 게 뻔한데. 와중에도 미련하게 제 안위나 생각하고 있는 게. 제 눈치나 보고 있는 게.
"아무튼 빨리 선배한테 사과드리고……."
"사과? 잘못은 그 새끼가 했는데 무슨 사과. 너는 그런 소리 듣고도 그 새끼한테 사과하라는 말이 나와?”
민희가 쏘아붙이듯 묻자 형준이 눈을 질근 감았다 떴다.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푹 잠긴 목소리가 작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선배가 한 말이……아주 틀린 말은 아니잖아."
"……야, 송형준."
"나 게이인 것도 맞고 헤픈 것도 맞아. 조금만 잘해줘도 쉽게 마음 주고, 좋아해. 너도 알잖아, 나 그런 애인 거."
차라리 형준이 엉엉 울면서 지훈의 욕을 퍼부었다면 이렇게까지 참담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형준은, 도리어 자신이 그런 소리를 들은 데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찾으려 하고 있었다. 심장이 끝을 모르고 가라앉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돌고 있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주먹을 꽉 쥔 탓에 손톱이 손바닥의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그런 얘기 들으면 너도 그냥 한 귀로 듣고 넘겨도……."
"내가 왜 그래야 돼."
목이 턱 막혀버린 탓에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대신 지랄 안 하면 네가 할 거야? 아니잖아. 너 멍청이처럼 그냥 듣고 속으로 삭이고 참기만 할 거잖아."
"……."
"내가 저런 새끼가 네 뒷담 까는 걸 가만히 듣고 있어야 돼? 내가 왜."
민희도 자신이 지금 애새끼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과실에서 지훈의 말을 맞받아쳤을 때부터 쭉, 민희는 이성적이지 않았다. 이성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 형준의 일이니까. 지훈의 입에서 유희거리처럼 오르내리던 이름이 다른 누구도 아닌 형준의 이름이니까.
"나는 왜 우리가 이러고 있어야 되는지 잘……모르겠어. 네가 화난 이유는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거야……?"
손등으로 눈가의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내며 형준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아 쥐고 있던 양손의 힘이 맥없이 풀렸다. 필사적으로 쥐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느낌.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것 같았다. 여기서 더 입을 열었다간 백 퍼센트 후회할 거라는 경고. 하지만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둑을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히 모르겠지. 네가 알 리가."
송형준은 모든 게 헤프다. 웃음도, 마음도. 그 알량한 사랑조차 헤프다. 강민희도 모르지 않았다. 다 알면서도 헤픈 송형준한테 홀라당 마음 줘버린 건 강민희였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송형준은 잘못이 없는 게 맞았다.
"내가 너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 시도 때도 없이 나한테 연애 상담 해달라고 할 만큼 눈치 없는 애니까, 넌."
"……."
"너 눈치도 없고 헤픈 애인 거 다 알면서 좋아한 내가 멍청이인 거잖아. 아니야?"
하지만 강민희는 지금, 아닌 척 하면서 송형준을 탓하고 있었다. 몰랐던 네가 나쁜 거라고. 내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모르는 네가 눈치 없는 바보인 거라고. 이미 생채기가 났을 형준의 마음에 마구 소금을 뿌려대고 있는 격이었다. 정작 멋대로 형준을 좋아해 버린 건 민희 자신이었다. 이런 식으로 제 마음을 전하고 싶은 생각은 정말이지 추호도 없었는데. 고백을 하는 상황도, 멘트도 죄다 최악이었다.
눈물로 축축이 젖은 형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너, 그게 무슨 말…….
"……좋아한다고. 내가 너."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던진 쪽은 민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게임의 결과는, 오롯이 형준의 손에 달려 있었다.
***
형준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오늘로 사흘째였다. 쏟아지는 고백을 듣고 굳어 버린 형준을 남겨둔 채 민희 혼자 집에 돌아가 버렸던 그 날 이후로, 형준은 자신의 모습을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끝까지 숨기려고 했던 거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으니 여태껏 했던 다짐들은 전부 다 무용지물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까마득하게 어린 후배한테 멱살 잡혔다가 짐짝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게 쪽팔렸는지 지훈은 민희를 신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희를 보면 피해 다니기 바빴다. 다른 선배들은 민희의 등을 두드려주며 어차피 내년이면 졸업할 사람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신경 쓸 생각도 없었다. 강민희가 신경 쓰고, 걱정하는 존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딱 한 명뿐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띄워진 전화 기록을 눈으로 훑었다. 부재중 전화만 서른 통을 넘었다. 휴대폰이 꺼져 있는 건 아니었으니 아마 형준은 자의로 전화를 받지 않는 중일 것이다. 민희가 손바닥으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한 번만 더 결석하면 형준은 영락없이 출석 일수 부족으로 전공과목 에프 학점을 맞게 된다. 제 탓이 맞았다. 이렇게 될 걸 뻔히 알았으면서도 형준을 몰아붙였던 건 자신이었다.
차라리 가벼운 마음이었더라면 진작 형준에게 고백하고, 설령 차이더라도 금세 훌훌 털어버렸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게 문제였다. 자신조차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커져버린 마음이 그 크기만큼이나 무거웠기 때문에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민희와 형준 사이에서 관계의 끈을 쥐고 있는 건 형준이었다. 형준이 손에서 힘만 풀면 언제든 끊어질 인연. 민희는 눈 깜짝할 사이 땅 밑으로 처박힐지도 모르는 도박에 제 마음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흘 전 그날엔 한순간 이성을 잃었다. 따지고 보면 고백도 아닌 분풀이였다. 유치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제 감정만 앞세우며 모든 걸 상대방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꼴이 딱 그랬다. 형준이 죄책감에 약한 성격인 걸 모르지 않았는데. 어린 건 형준이 아니었다. 애초에 다 자라지 못한 건 자신 쪽이었다.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긴 민희가 형준의 이름 옆에 있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만약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형준의 자취방으로 찾아가볼 심산이었다. 신호음이 길어졌다. 역시 안 받는 건가. 엄지손톱을 까득 깨물었다. 달칵.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에 민희가 눈을 크게 떴다. 신호음이 끊겼다. 전화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처음 듣는 여자의 것이었다. 빠르게 걷던 민희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누구세요?”
―아, 저 가게 종업원인데요. 휴대폰 주인 분이 전화를 못 받는 상태여서 제가 대신 받았어요.
미간 사이가 확 좁혀졌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어……휴대폰 주인 분 술 취하신 것 같은데 지금 눈도 못 뜨고 울고 계셔서요. 무슨 일 있으시냐고 여쭤봐도 그냥 울기만 하셔서.
……역시나. 민희가 짧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 바로 갈게요. 주소 불러주세요.”
이럴 줄 알았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천천히 몰아쉰 민희가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갔다. 익숙해도 너무 익숙한 갈색 머리통과 노란색 맨투맨.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 훌쩍이고 있는 모습마저 빼도 박도 못하게 형준이 맞았다. 설마 학교 안 나온 사흘 동안 매일 이랬던 건 아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송형준, 일어나.”
어깨를 쥐고 약하게 흔들자 마른 몸이 움찔거렸다. 비척이며 상체를 일으킨 형준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민희를 올려다보았다.
"어……민희다.”
그러더니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린다. 진짜 민희야? 묻는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셔츠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낸 민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멍한 얼굴로 형준이 중얼거렸다. 안 찾으러 온다고 했으면서…….
"나 아니면 너를 누가 데리러 와."
나 말고 친구도 없잖아 너. 농담인지 진담인지 속뜻을 알 수 없는 민희의 말에 형준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네. 그거 맞다. 작은 목소리로 맞장구를 치던 형준이 금세 고개를 툭 떨궜다.
"민희야."
"어."
"민희야……."
제 이름을 불러오는 목소리가 애달팠다. 꼭 상대를 간절하게 붙잡고 있는 사람처럼. 그리고 형준이 저를 붙잡는다면, 붙들려주는 것 외에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말해. 듣고 있어. 민희가 나직하게 대꾸했다.
"미안해. 내가 눈치 없는 바보라서……아무것도 몰랐어.“
흐느끼듯 울며 형준이 말을 이었다. 숨이 차는지 중간중간 공기를 힘겹게 삼켜내는 소리가 섞였다.
"네가 나한테 해주는 것들 전부 다 당연하게 생각했나 봐, 내가."
"……그만 울어."
"네가 나한테 잘해주는 게……그냥 네가 너무 착해서 그런 거라고. 넌 원래 다정한 애니까, 그래서 잘해준다고 생각했어."
나 안 착해. 전혀 안 다정해. 너한테만 이래. 너한테만 잘해주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내가 알 게 뭐야. 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너한테만 잘해주고 싶었어. 하지만 구태여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미 죄책감을 한가득 품에 끌어안고 있는 형준에게는 필히 독이 되는 말일 것이다. 지금 민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형준이 하는 말을 묵묵히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잘해주는 건 멋대로 오해하고, 설렜으면서. 네가 나한테 하는 행동들은 네가 진짜 좋은 친구여서 그런 거라고……."
형준이 목이 메는지 잔기침을 했다. 민희가 형준의 앞으로 물컵을 밀어주었다. 형준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숨을 헐떡이기만 했다. 자책 좀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도무지 안 떨어졌다. 결국 원인 제공한 건 자신이니까. 죄인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 정도다. 내 마음 몰랐던 거 네 탓 아니야.
"내가 말을 안 하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그래도."
"일어나기나 해. 집 가야지."
"이제 나 싫지……바보 같아서 싫어졌지?"
"내가 널 왜 싫어해."
싫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한 끝도 남김없이 모조리 형준의 손에 쥐여준 마음이었다. 이젠 더 이상 돌려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령 형준을 좋아하지 않는 방법을 알았다고 한들 소용없었을 것이라는 걸 민희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새내기 오티 뒤풀이 날, 시끌시끌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밖에 나와 바람을 쐬고 있던 자신에게 다가와 춥지 않느냐고 물으며 웃던 그 말간 얼굴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형준이 처음으로 꿈에 나왔던 그 새벽.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끝내 다다른 결론이 짝사랑의 시작임을 알았던 그 날 민희는 확신했다. 적어도 이 짝사랑을 내 손으로 먼저 끝낼 일은 없을 것 같다는 확신.
"그리고 너 바보 아니야."
바보는 형준이 아니라 민희 자신이었다. 형준이 술에 취한 채로 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오후 강의 다 내팽개치고 형준을 찾으러 왔으니까. 곱씹을수록 호구가 따로 없다. 이 짓도 벌써 몇 번째지. 호구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관두지 못하는 자신도 웃기지만 눈치 없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면서 그것 때문에 저를 싫어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형준도 우스웠다. 네가 눈치 없어서 싫어졌으면 진작부터 싫어했겠지. 눈치 없는 게 가끔은 미워도 싫어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눈치 없는 모습마저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더 많았으니까.
민희가 형준의 팔 밑으로 손을 넣어 조심스레 일으켜 세웠다. 힘이 다 빠진 형준의 몸이 민희에게 안기듯 기대섰다. 까슬한 머리카락이 턱 밑에 문질러졌다. 형준이 민희의 가슴팍 위로 고개를 묻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던 형준이 콱 막힌 목을 힘겹게 틔웠다. 민희야. 나 이제 그 선배 안 좋아해. 형준의 등을 받치기 위해 뻗던 민희의 손이 멈칫했다. 발음이 다 뭉개졌지만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형준을 좋아하기 시작한 이후로 민희는 언제나 기대를 버리려고 애써 왔다. 기대해봤자 실망할 걸 아니까 어차피 기대뿐인 기대로 남을 걸 아니까. 그렇지만 사실은.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그래도 한 번쯤은. 제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그러니까……."
알량한 사랑이라도 좋았다. 헤픈 마음이어도 좋았다. 순식간에 먼지처럼 부유하듯 사라질 감정이라도, 제게 닿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형준이 커다란 눈을 빛내며 널 좋아한다고 말하는 날이 온다면 더없이 벅찰 것 같다고. 억누르고 감추고 숨기던 마음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선명했다.
"조금, 아주 조금이면 되니까."
"……."
"나 기다려줄 수 있어……?"
목구멍에 무언가가 가득 들어찬 것처럼. 숨구멍을 막아버린 것처럼. 그래서 숨을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게 된 것처럼. 눈앞이 아득해졌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순간 민희의 허리를 감싼 형준의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체온과 체온이 맞닿는 느낌에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자각이 문득, 그리고 아주 강렬하게 민희의 머릿속을 덮쳐왔다.
"……어."
기다리는 거라면 신물 나게 많이 해봤다. 그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기다릴게."
해피엔딩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