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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틴 배경입니다. 미국 교육 제도에서 참고했습니다.

- BGM을 OST느낌으로 선정하여 방해가 될 수 있으니 괜찮으신 분만 틀어주세요!

 

 

 

 누구나 스포트라이트를 꿈꾼다. 외향적이든 내향적이든 간에, 관심을 좋아하건 싫어하건 간에. 스포트라이트가 꼭 빽빽이 들어선 관중 앞 무대 위에 있을 필요는 없다. 혼자 있는 방 안이어도 좋고 잘 보이고 싶은 상대 앞이어도 좋고 수많은 사람들 앞이어도 좋다. 관심을 받기 위한 용도가 아닌 밋밋하고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인생에서 탈피해 딱 한번이라도 우뚝 솟아보는 것. 그게 설령 대단한 것이 아니더라도 단지 바라던 일이 마치 주인공처럼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 아마 대부분이 막연하게 꿈꿔왔던 일일 것이다.

 주인공 앞에는 수없는 난관이 나타나고 사랑을 잃거나 빙 돌아가는 시련이 닥친다. 하지만 그 모든 엉킨 것들은 결국엔 풀린다.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데. 장애물만 닥치고 도통 해결될 기미가 없을 때 지치곤 한다. 난 결국 주인공이 아니라 그 옆에서 계속 실패를 거듭하는 보조 장치 정도였던 건가봐. 그뿐만 아니라, 다들 자신과 비슷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저마다 인생의 주연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때. 사실 뒤처지고 보잘 것 없는 건 나 혼자였을 때.

 내 인생인데 조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미숙하고 부족한 삶의 짜임.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의 애매함의 연속. 모든 발걸음마다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건 바란 적 없다. 그저 내가 주연인 삶. 아무리 완벽해도 영원히 조연으로 남는 것보단 순탄치 않더라도 주연으로서 당당하게 일어서고 싶었다.

 

 

 

-

 

 

 

 보호구가 신경질적인 손길에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곧이어 드러난 새카만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타고 허공에 흩날렸다. 팀은 승리했고 실수했다기 보단 오히려 잘한 편에 속하지만 민희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름 재능이 있다 생각했고, 또 오래 바라왔던 쿼터백이 아닌 최후방 수비 포지션에 머물러있기 때문에. 이 주에서 미식축구로 가장 유명한 고등학교 미식축구팀. 그 안에 소속된 민희는 유일한 동양인도 아니었고 늘 이목이 집중되는 쿼터백 혹은 그 주위 포지션이 아니었다. 바람을 가르고 자유자재로 경기장을 활보하는 몸짓. 멋지게 골을 넣고 보호구를 벗어던지며 포효하면 모두가 그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내지르고 박수를 친다. 실력이 없거나 인종 때문에 자리를 뺏긴 거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다만 더 쿼터백에 적합한 자가 존재했기 때문이었고 팀의 승리를 위해서 욕심낼 수가 없었다. 후보 선수들이 차고 넘치는 현실에서 눈에 띄지 않는 포지션이라도 맡은 게 어디냐며 나름 위안을 삼곤 했다.

 하지만 민희와 같은 포지션을 맡고 있는 친구는 제로에 가까운 실력을 가지고 이 자리를 꿰참으로서 주목과 박수를 받았다. 차라리 저렇게 성장 드라마라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꼭 쿼터백이 아니어도 충분히 반짝거리는 서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대체 언제 나만의 온전한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을까. 날 일어나게 하고 나 역시 손을 내밀 사람은 언제 나타나며 아주 오래도록 회상할 만한 기억은 언제 그릴 수 있을까. 알 수 없고 두려운 미래의 연속이었다.

 

 

 

 또 실패였다. 성적도 사랑도. 미국 유학길에 얼레벌레 오르게 되어 나름 열심히 했지만 결과가 따라주질 않았다. 다른 쪽으로 유별난 재능이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저 할 줄 아는 공부만 매진할 뿐이었지만 노력에 비해 미미한 결과만 늘 맛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 단 한 번도 성공해본 적 없는 쓰디쓴 사랑의 반복이었다. 왜 내가 좋아하기만 하면 애인이 홀라당 생기는지. 나름 꿀리는 건 없다고 늘 생각해왔지만 시험에 좌절하고 사랑을 포기하는 무미건조하다 못해 씁쓸한 일상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살다 죽는 게 내 인생 요약본인가, 하는 생각도 들기 일쑤였다. 그러면 사랑이라도 찾게 해주던가. 방금 제 애인의 팔짱을 끼고 스쳐간 구 짝사랑 상대를 애써 지워내려고 노력하며 생각했다.

 쟤는 전교 1등이고 누구는 만인의 짝사랑 상대인 애랑 환상적인 사랑을 하고 또 얘는 꼴통이었으면서 뒤늦게 급솟는 성적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그럼 난 뭐지?

 

 일면식 하나 없고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온 민희와 형준의 공통점은, 특별한 순간과 운명 같은 사랑과 환상적인 기억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가끔은 그럴 때가 있다고 한다. 눈이 마주치면 돌연 색다른 느낌이 몰아치는 순간. 수많은 사람과는 다른 무언가를, 나 혼자서만 알아챌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마주하게 되는 시간. 형준은 지금 돌이켜보면 민희를 처음 보았을 때 그러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짝사랑 상대는 제게만 특별하지 않았다. 형준에게 특별했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십중팔구 특별했고, 그 상대는 형준이 아닌 다른 사람을 특별하게 여겼으니까. 하지만 강민희는 달랐다. 형준에게 민희가 최우선인 것처럼 민희 역시... 착각이 아니라면 제가 최우선이었다. 그땐 왜 몰랐지. 왜... 키스하고 나서야 자각하는 거냐고.

 

 강민희와의 첫만남은 생생하다. 때는 낭만적인 사랑을 버린 지 한참 된 형준이 몇 번째인지 모를 실연을 겪고 난 직후, 망령처럼 머릿속을 떠다니는 짝사랑의 흔적을 잊고자 도서관에 틀어박혀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공부만 했던 날. 뒤늦게 가로등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여 걷다 문득 새벽 공기를 가르는 마찰음을 들었다. 저 멀리 필드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우연인지, 아니면 그럴 운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슴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작은 바람에도 시리고 아팠던 형준의 발은 어느새 필드 앞에 멈춰있었다. 그 위에는 쉴 새 없이 공을 들고 경기 시뮬레이션을 돌리듯 홀로 뛰어다니는 긴 그림자가 있었다. 흔하지 않은 새카만 머리가 꼭 별 하나 없이 흐린 밤하늘 같았다. 저런 머리 애가 있었나. 형준은 머리를 굴렸지만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상대였다. 그 애가 만들어내는 바람은 이상하게도 시리지 않았다.

 넋을 놓고 몸짓을 감상하길 몇 분, 시선을 느꼈던 건지 휙 돌아보는 얼굴과 딱 마주쳤다. 적잖이 당황해 가방끈을 꽉 움켜쥔 손에 민희의 시선이 닿았다. 민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런 애가 있었나. 빤히 바라본 건 자신이면서 외려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눈이 왕방울만한 남자애. 간간히 보이던 사람들이 싹 사라진 것을 보아 새벽이 깊어진 것이 분명해 정리할 겸... 말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날 왜 그렇게 보고 있었는지, 이 밤 늦게까지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학교에 남아있는 건지. 민희는 그대로 형준에게 걸어가 그 앞에 섰다. 가방 옆 붙어있는 정갈한 글씨의 한글을 보고 한국인이거니, 예상했다.

 

 

 

“안녕. 이름이 뭐야?”

“송형준.”

“난 강민희.”

 

 

 

 그러고 해사하게 웃던 얼굴. 형준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가로등에 의지해 바라보았던 흐릿한 얼굴이 어젯밤과 겹쳐보였다. 걔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키스한 거지. 왜 갑자기 분위기는 그렇게 잡힌 거고...

 

 처음 만난 가을의 그 날, 민희는 기숙사에 사는 형준을 데려다주었다. 잠시 걷는 동안 금방 친해져 번호까지 교환했고 다음날 점심까지 함께 먹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말이 잘 통했고, 재미있었고... 끌리는 무언가가 확실히 존재했다. 당시엔 아무 생각 없이 좋은 친구 만난 것 같아 들떠있었지만.

 형준은 탁자 위 회색 목도리를 바라보았다. 저거 강민희 건데... 기억의 흐름은 전날의 낮으로 거슬러 갔다.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알차게 보내기 위하여 밖에 나왔지만 한겨울 추위에 결국 카페에 들어갔고, 맨날 시켜먹던 자몽에이드와 레몬에이드 대신 핫초코 두 잔을 주문했다. 형준에게는 지독한 새 학기 스트레스가 있었다. 매번 반복되는 만족스럽지 않은 성적과 이맘때쯤 꼭 눈에 보이는 데서 데이트를 하고 다니는 구 짝사랑 상대들. 이번에도 역시나 창밖으로 팔짱을 끼며 지나가는 n번째 전 짝사랑남에 인상을 찌푸렸다. 난 뭐가 문제인 걸까. 작게 내뱉은 형준에 민희가 고개를 들었다. 형준은 멍하니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눈송이만 응시할 뿐이었다.

 형준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공부와는 거리가 먼 민희가 생각해도 치열하게 노력하는 것이 보였고, 길거리를 걷다 뜬금없이 한숨을 쉬면 열에 아홉은 매번 다른 구 짝사랑남들이 시야에 들어와 있었다. 자조적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횟수도 잦았다. 하지만 민희에게 형준은 언제나 가장 밝은 별이었다. 그저 눈부신 빛을 발했고 자꾸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 보기에도 그랬다. 절대...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알려주고 싶었다.

 

 

 

“형준아. 넌 네가 몰라서 그렇지 너를 좋아하는 사람 많아. 네 성적을 부러워하는 애들도 많고. 기억력 좋은 것도 친화력 좋은 것도... 물론 그렇다고 네가 고민할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야. 나도 뭐, 이 자리 못 올라오는 애들도 있는데 내겐 만족스럽지 않으니까. 덜 힘들고 덜 불안해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스스로를 먼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 이 정도에 있는 사람이구나. 그러니까 더 잘해낼 자신이 있구나. 넌 내가 널 생각하는 것보다 오히려... 너를 아끼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

“...웬일이야? 네가 진지한 말도 다 하고.”

 

 

 

 조금 퉁명스러웠지만 형준의 표정은 꼭 울 것 같았다. 진짠데... 왜냐하면 나는 네가 조금이라도 웃기를 바라니까. 그러니까... 널 좋아하니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이런 민희를 형준이 알 리 없었다.

 한겨울의 해는 금방 지평선 아래로 사라졌다. 훅 끼치는 찬 공기에 챙겨왔던 회색 목도리를 형준의 목에 칭칭 감았다. 눈만 빼놓고 깜빡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쿡쿡 웃음이 샜다. 살짝 쌓인 눈을 밟으며 도착한 기숙사 앞. 가로등이 고장 났는지 평소보다 훨씬 어둡고 흐릿하게 길목을 밝히고 있었다. 꼭 달빛 같았다.

 민희는 형준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나 갈게. 형준은 눈을 가만히 굴리더니 민희의 소매를 붙잡고 파묻힌 목도리 틈으로 웅얼거렸다.

 

 아까... 그 말, 고마워.

 

 대답을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갈색 눈동자만 내려다보자 곧 이상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 골목, 짙은 회색빛 가로등이 겨우 얼굴만 비추고 있고 좋아하는 상대와 마주보고 있는... 그런 어색한 상황이. 민희는 제가 둘러준 목도리를 아래로 잡아 내렸다. 형준의 조금 붉어진 입술이 시야에 들어찼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틈도 없이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기 직전 잠시 멈칫한 찰나, 형준이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고 명치 부근이 세게 당겨지는 느낌이 훅 들었다. 결국... 그대로 키스했다.

 머릿속은 비상이었다. 형준이 제 소매를 힘주어 잡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지, 이제 어떡하지. 민희의 반대쪽 손이 허공에 애매하게 뜬 채 방황하다 결국 형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 온기에 형준이 몸을 작게 떨었다. 조금씩 움직이는 작은 입술과 혀의 마찰음이 웅웅 울리며 적막한 밤거리를 채웠고, 얼굴로 온통 열이 몰렸다. 눈을 질끈 감았던 형준이 살짝 눈을 떴다. 눈앞에 뺨 위로 길게 그림자를 진 기다란 속눈썹이 있었다. 어깨가 불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현재. 그 당시 천천히 떨어진 민희는 눈도 못 마주치고 황급히 시야를 벗어났다. 사실 형준도 민희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온통 혼란스러움에 연소된 것만 같았다. 남은 건 오직 민희의 체향이 아직 느껴지는 저 목도리 하나.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했다. 대체 이제... 쟤를 어떻게 봐야 하지? 그 전에 나한테 키스는 왜...

 

 걱정은 의미 없었다. 강민희는 놀랍게도 멀쩡한 얼굴이었다. 마치 술 진탕 마시고 필름이라도 끊긴 것처럼, 혹은 지독하게 생생한 꿈을 꿨나 착각할 정도로. 하지만 명백한 현실이었다. 목도리를 건넬 때 조금 붉어지는 귓가를 분명히 봤거든. 사실 이곳에서 키스는 장난이었다. 원나잇도 흔히 하는 애들인데... 쟤는 여기 살았음 얼마나 살았다고. 빈정이 확 상했다. 그런데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애한테 내 첫키스 네가 뺏어갔으니 책임져! 따위의 말을 했다가는 정말 오백 배는 어색해질 것만 같아 관두기로 했다. 형준도 그냥 쿨한 척... 친구끼리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척...을 하기로 했다. 바보 같지만.

 그렇게 그 날은 겨울과 함께 짧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마도.

 

 

 

-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졸업 학년으로 접어들기 직전 학기라 그런지, 바짝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형준도 그 중 하나였다. 매번 노력을 배신하는 결과에 신물이 난지 오래였고, 이젠 증명해보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민희는 학기가 끝나갈 여름 즈음 찾아올 큰 경기를 위해 연습에 매진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지난 반년 매일 하루의 대부분씩 붙어있던 때보다 부대끼는 횟수가 줄었다.

 그리고 그맘때쯤 처음으로 형준에게 애정을 선연히 내비치는 사람이 생겼다. 생긴 것도 괜찮고 키도 크고 여러모로 인기가 많은 한 학년 선배였다. 처음 형준은 그런 사람이 제게 관심을 표할 리가 없다 생각해 눈치 없게 굴었지만 갈수록 의구심이 차올랐다. 그럴 때 바로 생각난 사람은 단연 강민희. 하필 어쩌다 보니 다음 수업을 위해 그 선배와 필드를 지나칠 때 연습 중인 민희를 발견해서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다음 날, 형준의 온갖 생각이 무색하게도 민희는 공개 고백을 받았다. 새빨간 머리의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매력적인 여자애한테. 수많은 사람이 목격했고 형준도 이에 포함되었다. 묘한 패배감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키스는 나랑 하고 사귀는 건 다른 애랑 하냐는 그런 생각. 이젠 일순위에서 밀려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그래서 그 선배를 만났다. 왜냐하면 강민희도 그 여자애랑 자주 있는 모습이 종종 보여서. 괜한 승부욕 따위가 들었다. 형준은 민희도 자신도 바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 마디 언질이 없다는 것에 기분이 상해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에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유치하게.

 결국 딱 마주쳤다. 빨간 머리 여자애랑 광장에 서있던 민희가 형준과 형준 옆의 선배를 번갈아 보다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형준이 생각했던 반응은 이런 게 아니었다. 어... 하는 사이 이미 지나치고 있었다. 선배의 질문에 대답은 했지만 신경은 저 뒤 민희에게 온통 쏠려 있었다. 왜 모른 척하지. 갑자기... 형준은 일주일 전에 멈춰있는 민희와의 연락을 하릴없이 들여다보았다. 이대로 어색해지긴 싫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코앞으로 닥친 시험에 형준은 선배와도 만날 기회가 현저히 적어진 채 도서관에 틀어박혔고 민희는 필드를 제외한 곳에서 얼굴을 비치는 경우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시험날 아침. 피곤해 푸석해진 눈가를 비비며 기숙사를 나선 형준에 익숙하고 낯선 얼굴이 보였다. 저만큼 살이 많이 내린 모습이었다.

 

 

 

“어, 형준아.”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아무렇지 않은 말투와 표정. 뭐가 그렇게 태연한지 모르겠다. 괜히 기분이 상해 심통을 부렸다. 여긴 왜 왔어.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목소리가 날이 서려 있어 조금 후회했다. 그래도 간만에 보는 건데 괜히 그랬나. 살짝 고민하던 민희가 상체에 가려져있던 팔을 내밀었다. 손에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너 오늘 시험이잖아. 네가 진짜 열심히 한 거... 많이는 못 만났지만 나한테도 보여.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뒷목을 매만지다 빠르게 걸어와 손에 직접 쥐어주곤 연습이 있다며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안에는 형준이 허구헌 날 맨날 마시는 레몬에이드가 직접 만든 건지... 삐뚤빼뚤한 글씨로 <레몬에이드> 라 써져 있는 일반 페트병에 담겨있었다. 그리고 초콜릿 몇 개. 왠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시험을 잘 볼 것 같았다.

 그리고 형준은 처음으로 일등을 했다. 벽에 붙은 성적표를 보고 형준은 전부 민희 덕분이라 생각했다. 아침에 민희를 만나서, 걔가 준 레몬에이드를 마시고 초콜릿을 먹어서. 걔의 응원을 받아서.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민희에게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필드로 향하던 형준의 팔이 돌연 붙잡혔다. 돌아보니 선배였다. 일등 했다며, 축하해. 밥 먹으러 갈까? 대답을 고르는 사이 선배 뒤로 우뚝 서있는 민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광장에서 마주쳤던 것처럼, 강민희는 그대로 뒤를 돌아 멀어졌다. 형준은 알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

 

 

 

 여전히 찬바람이 불던 초봄이 지나고 제법 따뜻해진 기운이 내려앉았다. 민희의 손 안에서 부서지는 금빛 머리카락이 푸석했다. 형준이 왜 뜬금없이 머리를 탈색했냐며 놀랄 것이 눈에 선했다. 아니나 다를까, 새카만 머리부터 찾던 형준의 눈에 혼란이 스미다 민희와 눈이 딱 마주치고 우뚝 멈췄다. 황당한 표정으로 가까워지던 형준이 자리에 앉자마자 내뱉은 말은 역시나.

 

 

 

“너 무슨 일 있냐?”

“왜? 많이 이상해?”

“아니... 네 얼굴에 이상할 리가 있겠냐. 그냥... 새로워서.”

 

 

 

 민희는 그냥 웃었다. 그 선배가 금발머리라서... 라고 어떻게 말해. 제 옷 색과 같은 자몽에이드만 들이켰다. 본론을 꺼내야 하는데 도통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괜한 것만 다시 물었다.

 

 

 

“그... 선배랑 만나는 거야?”

“만나는 건 아닌데... 그냥 이번주 토요일에 잠깐 보기로 했어.”

“토요일? 아...”

 

 

 

 무릎 위 손에 쥐어진 티켓이 조금 구겨졌다. 경기... 와달라고 하려 했는데. 왜냐하면 마지막 경기니까.

 

 

 

“나 이번 경기만 뛰고 그만 두려고.”

“너 탈색하더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니 갑자기 왜?”

 

 

 

 그냥... 어차피 특출난 것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나가서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냥 졸업 전에 뭐라도 찾아서 그쪽 길로 나가보게. 괜히 눈을 피했다. 형준은 꽤 섭섭한 표정이었다.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선택한 거니까 다른 것도 나름대로 잘할 수 있을 거야. 형준의 목소리에 괜히 안도가 되었다. 나는 도망치는 게 아니야.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결국 티켓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굳이 마지막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

 

 

 

 경기가 시작한지 십 분 남짓, 민희는 묘한 기운을 느꼈다. 상대팀의 움직임이 맨 뒤 민희에게 보일 정도로 수상쩍었다. 이내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 지 알아채고 입을 열려는 찰나, 상대 쿼터백에 의해 제 팀 쿼터백이 바닥을 굴렀다. 일어나지 못하는 쿼터백에 경기가 중지되고 비상이 걸렸다.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물증이 없어 쿼터백을 교체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머릿속에 비상벨이 울렸다. 다급한 감독의 목소리가 윙윙 울렸다. 빠진 쿼터백의 자리를 대신 채울 수 있는 사람. 팀원 중 쿼터백 훈련을 받거나 연습 경기를 뛰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빼고. 정 아무도 없으면 후보 선수를 투입할 수 있겠지만 팀의 입장에선 기존 선수가 대체하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하지만 만약 실수하면? 비교될 만큼 실력이 부족해서 결국 패배하면? 이를 마지막으로 그만둘 생각이었지만 겁이 났다. 내가 스스로 그만두는 것이지만 마치 쫓겨나는, 혹은 실패에 좌절하고 떠나는 것처럼 보일까봐.

 그래도. 만약에 그럴지라도 그토록 바라왔던 순간이잖아. 퍼뜩 든 생각은 어제의 형준의 목소리와 오버랩 되어 귓가에 울렸다. 너... 쿼터백 되고 싶어 했잖아. 그런데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두게? 민희는 손아귀에 힘을 주어 보호구를 세게 움켜잡았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오는 건 아니니까. 정말로 바라고 꿈꿔왔던 순간. 수많은 사람들 앞 큰 경기에 쿼터백으로 출전하는 것.

 

 

 

“제가 할게요.”

 

 

 

 형준은 이곳에 없었고, 포기하더라도 후에 그 사실을 숨길 수 있었지만 딱 하나, 떳떳해지고 싶었다. 비록 중간에 맥없이 포기해버린 신세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용기를 냈다고. 한 번이라도 좀 빛나보겠다고 발버둥 쳐본 이유는 결국 너라고.

 

 

 

-

 

 

 

 형준은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선배의 눈을 어색하게 피하며 자몽에이드를 빨대로 쪽쪽 빨아 마셨다. 이거 강민희가 맨날 시켜먹던 건데. 붉은빛 음료를 들여다보자 문득 기억 속 얼마 전 어느 봄날 비슷한 색의 맨투맨을 입고 뜬금없이 탈색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제 앞에서 어색하게 웃던 얼굴이 생각났다. 강민희와 나. 우린 같은 공통점이 있었다. 밋밋하고 애매한 삶의 연속이라는 것. 말리지 못했던 이유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마냥 붙들며 매달릴 수 없단 걸 나도 잘 알았으니까.

 그래도 자꾸 생각이 밟힌다. 강민희를 처음 봤던 어느 가을. 발밑에서 바스러지는 낙엽 소리와 필드 위를 뛰어다니는 발걸음 소리가 녹아들었던 그때.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쟤가 누구지 골몰하다가도 지금 이렇게 그 날의 가을바람 냄새까지 생생히 떠오를 만큼 꽤 깊이 마음에 담았던 순간. 그리고 계절이 지나 또 어느 날의 겨울. 나란히 핫초코를 시켜놓고 오랫동안 이야기하다 몸을 붙이고 집에 가던 길... 피어나던 입김과 조금 어색하게 닿았던 입술. 걔는 주위에서 흔히 그러듯 분위기에 휩쓸려 입술 부빈 것처럼 굴었고 나 역시 그랬었는데 사실은... 너도 날 좋아하고, 나 역시 널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른 척 하고 싶어서 그랬었나봐. 키스했을 때 네 귀가 온통 새빨개졌던 것도, 닿은 가슴이 세게 울리는 것도 내 착각일 거라며 부정했던 이유. 주저앉은 날 일으켜준 널 잃게 될까봐.

 

 형준아 넌 네가 몰라서 그렇지 너를 좋아하는 사람 많아. 네 성적을 부러워하는 애들도 많고. 기억력 좋은 것도 친화력 좋은 것도... 물론 그렇다고 네가 고민할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야. 나도 뭐, 이 자리 못 올라오는 애들도 있는데 내겐 만족스럽지 않으니까. 덜 힘들고 덜 불안해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스스로를 먼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 이 정도에 있는 사람이구나. 그러니까 더 잘해낼 자신이 있구나. 넌 내가 널 생각하는 것보다 오히려... 너를 아끼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

 

 언젠가 제게 건넸던 강민희 말이 맞았다. 형준은 아무리 계단을 올라도 맨바닥에 정체된 기분을 달고 살았다.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보이지 않고 저 위 사람들보다 얼마나 덜 했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개수를 세기에만 급급했다. 그런 습하고 축축한 감정들은 형준을 자꾸만 아래로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맨 처음 어떻게 발을 딛었고 어떻게 뛰어 올랐나 망각한 채로 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제 발밑에 가려진 안개를 걷어내고 손을 내민 건 민희였다. 우리 이만큼 왔어. 조금만 더 힘내서 위로 올라가자.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는 사이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던 과거들. 이젠 형준이 잠시 멈춘 민희의 손을 잡아줄 차례였다. 사라질까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형준은 민희가 있어야만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형준이 바라는 건 강민희의 손을 잡고 아직 함께 겪지 못한 여름을 만끽하는 것. 누구 한 명이 지치면 말없이 끌어안아주고 언제라도 팔 한 쪽을 내미는 것. 그래서... 멈추는 날이 온다면 나란히 앉아 꼭 도시를 덮을 듯이 흩뿌려진 조명 같은 지난날들을 회상하며 이만큼 올라왔다고 수고했다며 서로 토닥여주는 것.

 오늘 아침 막 기숙사를 나선 저를 거친 숨을 들이쉬며 붙잡았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손에는 구겨진 티켓이 들려있었다. 오늘... 그 선배 만난다고 해서 안 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늦더라도 꼭 와줘. 미안해.

 

 

 형준은 다 마신 자몽에이드 컵을 들고 일어났다. 선배 죄송해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살짝 당황한 듯한 선배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안 그래도 너 다른 데에 정신 팔려 있는 거 티 났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걔가 부럽다. 잘 되길 바랄게. 네 선배. 죄송해요. 뒤를 돌아 입구 근처 쓰레기통에 빈 통을 버렸다. 카페 문을 열어젖히고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가벼웠다. 여름의 초입, 태양빛이 세게 내리쬐며 건조한 공기를 달구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심장이 간질거리기만 했다. 벌써 경기가 한창 진행될 시간이었다.

 강민희 곁에 있던 빨간 머리. 나랑 키스해놓고 공개 고백 받은 강민희. 선배와 함께 마주쳤던 순간 그 표정. 티켓을 내밀던 손끝의 미세한 떨림. 장면 하나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너무 어렵게 생각했던 것 같아. 어쨌든 난 결국 지금처럼 너에게 갈 것이었는데. 네가 바랐던 것처럼.

 

 

 

-

 

 

 

 경기가 끝나는 소리가 먼 곳에서 천천히 들려왔다. 민희는 필드 한가운데 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보호구를 천천히 벗었다. 얼굴로 흘러내리는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주위를 둘러보자 다 이쪽을 바라보고 환호하고 있었다. 2대 1. 역전승. 그리고 승리 주역은 강민희. 이러한 일련의 단어 배열이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가장 낯선 건 맨 앞자리 저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는 송형준. 교체 투입된 이후 한참 끌려가던 경기에 끝없는 후회를 속으로 삼키고 있을 때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정신없는 틈에서도 형준의 입모양은 뚜렷하게 읽을 수 있었다. 잘하고 있어. 안 올 줄 알았는데. 그 선배랑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었나. 어쨌든 형준은 저를 보러 왔고 그 덕분에 이 상황이 재구성될 수 있었다. 잘 보이고 싶어서. 형준이 다른 것을 제쳐두고 이곳에 왔으니까. 결국 민희는 골을 두 번이나 넣었다. 그러므로 이 순간의 주인공은 사실 따로 있다는 것.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불안정한 내가 단 하나 네가 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쉴 새 없이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게 되니까. 내가 아니라... 송형준 너라고.

 형준이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돌연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필드 가까이 다가섰다. 어느새 필드 위에는 민희 혼자만 남아있었고, 형준은 민희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걷다 이내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한 걸음 걸음마다 작열하는 태양빛이 따라붙는 듯 했다. 그러니까 꼭 연극의 하이라이트 연출처럼. 한가운데 돌처럼 굳어있는 강민희까지 다섯 걸음. 형준은 잠시 멈춰서 민희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좋아해. 너와 함께 손을 꼭 잡고 무엇이 나타나든 함께 걸어가고 싶어. 단독 주연 영화 말고 로맨스든 재난 탈출 영화든 성장 영화든 찐한 우정 영화든 너와 같이 주인공이 되고 싶어. 혼자 찍는 영화 따위는 필요 없어. 어차피 네가 없으면... 아무 의미 없을 것 같거든.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가 묘한 분위기를 타고 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형준은 입을 열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심장을 애써 짓누르고 천천히 민희의 앞에 섰다. 그 얼굴에 가려진 햇빛이 사방으로 부서지며 그늘을 만들었다. 가슴이 형준의 달음박질을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소란스럽던 주위는 어느새 고요히 가라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오직 제 앞에 선 작은 체구만 세상에 꽉꽉 찼다. 그 흔들림 없는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다. 너도 나와 같다는 걸.

 

 

 

“강민희. 너... 그 여자애랑 만나?”

“...아니.”

“만날 거야?”

“아니.”

 

 

 

 의미 없는 질문과 대답의 연속에 형준은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고 있으면서. 여름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지만 어디선가 불어온 반 년 전 겨울의 공기가 민희의 코끝을 시리게 했다. 돌이켜보니 전부를 의지하고 있었고, 형준의 저 웃음에 일순간 멈췄던 세계. 경계를 버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진 사랑의 맨얼굴에 휩쓸려 갖다 대었던 입술. 같은 마음인 걸 어렴풋이 알았음에도 친구보다 못한 사이가 될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모른 척했던 시간들. 어리석은 짓이었다. 영화의 결말이 새드 엔딩이라면 이는 충분히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송형준과 함께하지 않으면 영화는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지금도, 포기했던 꿈에 기적처럼 기회가 다시 찾아왔으니까.

 

 

 

“나 너랑 내년도 함께하고 싶어.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너랑... 많은 것들을 겪고 싶어.”

“친구로서 말고?”

“친구로서 말고.”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길고 긴 리허설을 거쳐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 아닐까. 보호구를 세게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모든 소음이 가라앉고 배경은 지워지고 캄캄한 연극 무대에 오직 둘만.

 

 

 

“나랑 뭐든지 다 하자, 같이. 친구로서 말고.”

 

 

 

 민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형준이 민희의 두 볼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형준의 키에 맞춰 얼떨결에 몸을 숙인 민희가 따뜻한 색으로 빛나는 형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말랑하고 차가운 손바닥이 느껴지자 닿은 볼의 온도가 점점 올라갔다. 형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민희의 입술에 발뒤꿈치를 살짝 든 형준의 입술이 닿았다.

 

 

 

 누구나 스포트라이트를 꿈꾼다. 하지만 그것은 단번에 찾아오지 않는다. 무수한 작은 걸음이 쌓이고 쌓였을 때. 비로소 밝고 눈부신 빛이 기다렸다는 듯 터진다. 많은 걸음 동안 곁을 지켜준 많은 부가적 요소를 떠올리며 다음 스포트라이트를 향한 동기를 얻는다. 타인의 완벽하고 부족함 없는 삶은 존재하더라도 어디에나 들여다보면 작은 균열은, 혹은 그러했던 흔적은 있기 마련이다. 미성숙의 연속. 그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는 지에 따라 수많은 길로 갈린다.

 형준은 높은 성적을 받았을 때,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선배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받았을 때를 찬찬히 돌이켰다. 하지만 높은 성적은 어떻게 받았더라, 강민희가 끊임없이 할 수 있다는 장난 섞인 진심을 보여줘서였지. 그 선배를 만날 땐 자꾸 강민희가 생각났지.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정상의 모습은 앞선 상황들이었는데, 정작 맞닥트려보니 이상하게도 몇 퍼센트 부족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아챘다. 지금은 울퉁불퉁한 굴곡 중 단연 꼭대기에 선 순간도 아니고 절정에 오른 순간도 아니지만. 미성숙과 서투름과 낯설음에 싸인 두근거림이 존재하는 순간이었다. 형준은 제 뒷목을 잡아당기는 손아귀를 느끼며 민희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필드를 둘러싼 잡다한 소음들이 아득하게 멀어지며 빙글빙글 돌았다. 뺨에 와 닿는 작은 숨결. 그리고 사랑을 확인하는 두 번째 키스. 계속 맞물리는 입술에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비틀며 더 가까이 붙었다. 처음 내딛는 발걸음치고는 환상적이고 말도 안 됐다. 특별한 순간과 운명 같은 사랑과 환상적인 기억. 전부 다... 지금이었다.

 주인공이 다른 주인공의 손을 잡은 순간. 맞닿은 가슴에서 전해지는 엇박자의 세찬 박동을 따라 바람이 몰아치는 듯 했다. 각기 다른 색을 띤 두 개의 스포트라이트가 한꺼번에 반짝이며 쏟아졌다.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느낄 형형한 불빛이 꼭 감은 눈 위를 덮었다.

 

 길고 긴 영화, 혹은 드라마나 연극이 시작했다. 장르와 주제는 미정. 아직 정해지지 않은 무수한 미래와 역경에 따라, 그리고 그에 대한 대처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틀이 구성된다. 너와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그려질까. 적어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는 알 것 같다. 눈이 부실 만큼 터져 나오는 빛을 지금처럼 꽉 끌어안은 채로 맞이할 수 있게.

 

 이 영화의 끝이, 우리의 끝이 해피엔딩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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