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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희 X 송형준

 

 

 

 

 

 

 

 

 

 

 "야."

 

 

 "응..?"

 

 

 "너 숨 쉬지 마."

 

 

 "..."

 

 

 "너 때문에 집중이 안 되잖아아 기말 코 앞이라고오! 대학은 가야 할 거 아니야. 나 대학 못 가면 네가 책임 질 거야? 아 네가 책임 질 거냐고오!!"

 

 

 

 

 친구 3년차, 연애 10개월차. 서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보이다 급 어색해져서 내숭 떠는 사이 된 거?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어엉 알았어 알았어 공부하자 공부!"

 

 

 

 

 그저 투닥거리기 바쁜 사이다. 

 

 

 

 

 강민희와 송형준의 연애는 사실 친구였을 적과 별 다르지 않았다. 틈만 나면 투덜투덜대는 송형준과 쩔쩔매는 강민희. 딱 그거였다. 친구였을 때도 그랬고, 친구 졸업장 떼고 나서도 그렇다. 가만히 옆에서 숨만 쉬어도 시끄럽다 숨 쉬지 말라는 개소리는 기본, 게임 랭크 올려 줄 때뿐이 못 듣는 사랑해 소리, 길 가다 손 잡으려 하면 와다다닥 솜방망이질, 예쁘다 귀엽다 해도 미친 사람 취급, 10개월차 송형준 남친 강민희는 이런 연애에 조금씩 지쳐갔다.

 

 

 

 

 *

 

 

 

 

 2학년 2학기 기말, 올해의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대충 벼락치기한 탓에 보기 좋게 말아 먹고 큰 깨달음으로 역시 정시나 파야겠단 소리를 주구장창 달고 사는, 어김 없이 찾아온 그 시즌. 속상한 마음에 너랑 같이 공부해서 그렇다느니 너 때문에 망했다느니 툭툭 망언 폭격하던 송형준을 어르고 달래 겨우 떡볶이 사 주겠다며 집으로 데려왔다. 가방 한번 현란하게 벗어던지고 강민희 침대 위에 쪼로록 가 앉은 형준은 폰 붙들고 게임이나 하기 시작했다.

 

 

 

 

  "형준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우리 크ㄹ,"

 

 

 "올 네가 생각도 해? 큭 개쩐다."

 

 

 

 

 요새 강민희의 고민 1순위는 '형준이와 연인으로서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 것이냐'하는 형태이다. 스키장, 놀이공원 등 인산인해로 금세 깔려 죽을 듯한 장소들밖에 떠올릴 수 없던 민희는 형준과 함께 얘기해 보고 싶었다. 

 

 

 

 

 "아니.. 게임 그만하고 내 말 좀 들어봐."

 

 

 "듣고 있어 말해. 아, 악! 미친 저 새끼 개트롤까네."

 

 

 "야 송형준 너 진짜.."

 

 

 "너 지금, 야 송형준이라고 했냐?"

 

 

 

 

 게임만 주구장창 하다가 강민희 입에서 나온 야 송형준이라는 네 음절에 급 삔도가 상했는지 별안간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본다. 

 

 

 

 

 "나는 성 붙여서 부르면 안 돼? 너는 맨날 너 니 야야거리고 밥 먹듯이 강민희 강민희 하면서."

 

 

 

 

 팔자 눈썹에 눈꼬리는 한껏 내려서 입술 댓발 나온 강민희 꼬라지가 꽤나 볼 만했다. 송형준은 그래도 적반하장은 영 적성이 아닌 건지 염치는 챙기고 대화를 잇는다. 

 

 

 

 

 "그럼 그러시든지~"

 

 

 "아, 너 진짜 나 좋아해서 사귀는 거 맞아?"

 

 

 

 

 내내 쌓아 왔던 불만을 토로함과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정적 1초, 2초, 3초. 온갖 불만은 다 베어 있는 얼굴 하고 송형준 바로 보며 질문 뱉은 강민희는 살짝 후회하고 싶어졌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송형준. 

 

 

 

 

 티 없이 말간 얼굴에 동그랗게 커다란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빤히 마주보다가 대뜸 강민희 얼굴 붙잡고 입술을 부딪혀 사정없이 빨아댔다. 놀라 뒤집어진 강민희는 눈 크게 뜨고 제 앞에 꼭 감은 눈 한 채로 입술을 마냥 쪽쪽 빨아대는 송형준을 보았다. 기습으로 들어온 귀여운 얼굴에, 귀여운 행동에 모든 화가 누그러져 버렸다. 입술 부비는 거 정도야 애저녁에 마스터한 스킨십이지만 강민희의 심장은 몇 번이고 세찬 펌프질을 계속했다. 얼굴이 발개질 무렵 입술이 떨어졌다. 

 

 

 

 

 결국 그렇게, 강민희의 불만은 다시 수면 아래로 잠기고 말았다. 

 

 

 

 

 *

 

 

 

 

 네 번의 시험이 모두 끝난 뒤 교실의 풍경은 한껏 느긋하게 풀어져 있었다. 강민희와 송형준이 속한 2-3반 교실도 매한가지였다. 영화를 틀어주든 어쩌든 별 관심 없는 강민희 송형준 무리 애들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얘기로 한창 핫했다. 

 

 

 

 

 "그래서 너네 크리스마스에 뭐 하는데? 난 일단 약속 안 잡음."

 

 

 "안 잡은 게 아니라 여친이 없으니까 못 잡은 거겠지."

 

 

 "너도 없잖아 짜샤. 여기 다 솔로 아님?"

 

 

 "노노 아님."

 

 

 "에? 뭐야 누구야 어떤 놈이야."

 

 

 "강민희랑 송형준 둘이 사귀잖아."

 

 

 "야 너 어떻,"

 

 

 

 

 지들끼리 좋다고 하하호호 떠들다가 느닷없이 나온 개소리에 혼자 뜨끔한 강민희가 안절부절 딱 봐도 불안한 안색으로 어떻게 알았냐 물어보려 하자 송형준이 발끈해 칼차단한다.

 

 

 

 

 "뭐래 미쳤냐? 내가 뭐가 아쉬워서 쟤랑 사귀어."

 

 

 

 

 강민희의 심장이 덜컹, 하고 내려앉았다. 습한 무언가가 속에서부터 급하게 울컥울컥 올라왔다. 가시 돋힌 말은 곧이곧대로 심장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귀에는 송형준의 진심처럼 구는 목소리가 메아리로 들리기 시작했고 자꾸만 비참해졌다. 그때 밑에선 교복 바지 위로 슬쩍 허벅지를 꼬집는 송형준의 매운 손이 느껴졌다. 확 정신이 든 강민희는 횡설수설 아무렇게나 씨부린다. 

 

 

 

 

 "그래 내가 ㅈ, 쟤보단 낫지. 수준부터가 달라 쟤랑 나는. 삼백 번 다시 태어나도 사귈 일 없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마구 하고서는 순간적으로 아찔해진 정신에 크게 호흡했다. 

 

 

 

 

 "아 됐고, 그럼 다 갈 수 있는 거지?"

 

 

 "갑자기? 뭐 어디 가는데."

 

 

 "부산 고? 외박하자."

 

 

 "오케이 노빠꾸. 술도 까."

 

 

 

 

 강민희에게 2차 고비가 찾아왔다. 못 간다고 말해야 하는데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도 않았을 뿐더러 송형준과 입을 맞추지도 못 해서 말이 헛나갔다간 큰 재앙이 닥칠 수도 있었다. 또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송형준과 저만 쏙 빠진다면 분명히 의심이 따를 테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송형준 눈치 보며 속으로 안절부절하는데,

 

 

 

 

 "콜 외박 완전 좋다. 난 찬성!"

 

 

 

 

 송형준의 들뜬 목소리와 함께 강민희의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

 

 

 

 

 완전 삔또가 상한 강민희는 온종일 저기압이었다. 급식도 대충 깨작거리다가 먼저 올라오고 송형준에게 말 한 번 붙이지도 않았으며 수업 시간엔 엎드려 있기 바빴다. 일종의 시위였다. 나 지금 진짜 삐졌으니까 좀 알아 달라고. 네가 나 좀 달래 달라고. 하지만 송형준은 눈치가 없는 건지 뭔지 강민희에게 일절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부산 여행 계획이나 짜고 앉았다. 강민희는 엎드려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참 이상했다. 제가 말을 걸지 않으면 송형준과 한 마디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강민희를 끝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학생으로서의 모든 일과가 끝나고 후딱 가방 챙겨서 교실 밖으로 향했다. 항상 함께 하교했지만 지금 강민희는 송형준에게 삐졌으니까. 내심 송형준이 자기를 붙잡아 주길 바라면서 일말의 기대를 하고 나가려는데 다행이도 송형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강민희! 어디 가!"

 

 

 

 

 재빨리 강민희를 붙잡는 목소리에 속수무책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나 삐졌소 컨셉으로 그대로 걸어나갔어야 하는 건데, 또 져 버리고 말았다. 송형준이 옆으로 붙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자 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송형준과는 10분이 지나도록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시금 들어차는 씁쓸한 기분에 한숨을 깊게 쉬었다. 어느새 강민희와 송형준이 사는 아파트 단지 안이었다. 

 

 

 

 

 "너 오늘 어디 아프냐?"

 

 

 "..."

 

 

 "병원 갈래?"

 

 

 "됐어.."

 

 

 

 

 강민희의 난기류를 느낀 송형준은 영문을 몰라 그저 옆에서 가만히 걷기만 했다. 속으로 걱정도 좀 하면서 민희를 슬쩍슬쩍 쳐다봤다. 눈치 봐가면서 걷는데 강민희가 인사도 없이 지 집 쪽으로 쏙 빠졌다. 평소 같았으면 헤어지기 싫다는 둥 더 같이 있자는 둥 하다가 결국 한 사람의 집으로 향하곤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송형준은 얼이 빠져서 강민희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진짜 어디 아픈가 싶다가도 빡이 쳤다. 아니 저 새끼 갑자기 왜 지랄이야?

 

 

 

 

 늦은 밤까지도 연락 한 번 없었다. 매일 같이 연락을 이어가던 카톡창 끝자락엔 오늘 아침에 강민희에게 보낸 빨리 나오라는 텍스트뿐이었다. 송형준은 몇 번이고 애꿎은 폰 화면 스크롤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또 화가 나서 폰 집어 던지고 괜히 방 정리나 했다. 내일 학교 가서는 어떡하지. 이미 깨끗한 방을 청소하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강민희였다. 

 

 

 

 

 *

 

 

 

 

 함께하던 등하교는 물론 매일 하던 연락도 끊기고, 냉전 중이라 말 한 마디 못 한 지도 벌써 1주일. 이렇게 크게 싸운 적도 없었을 뿐더러 강민희가 송형준에게 이런 식으로 나온 경우는 처음이라 그런지 송형준은 만만찮게 충격 먹었다. 보통 잘게 투닥거리다가 토라지면 24시간도 안 돼서 먼저 숙이고 들어오는 게 강민희였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송형준은 허락하지 않는 자존심을 겨우 꺾어 눈 딱 감고 강민희에게 카톡을 보냈다. 지금 그 무엇보다도 강민희가 너무 보고 싶었다.

 

 

 

 

 '놀이터로 나와'

 

 

 

 

 고민하다 보낸 딱딱한 글자에 한숨을 폭 쉬었다. 자꾸만 마음과 다르게 못되게만 구는 자신을 책망하며 주섬주섬 롱패딩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

 

 

 

 

 늦은 밤이라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볼 수 없는 놀이터에서 무료하게 그네에 앉아 강민희를 기다렸다. 아니, 사실 무료하진 않았다. 보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나오라고 하긴 했지만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할까? 너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미안해? 아니지 내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아니 그 전에 얘 나오기는 하는 거야? 안 나오면 어떡하지? 내가 싫어졌나? 나 차인 거야? 강민희 이 새끼 나 좋다고 질질 짜면서 고백할 땐 언제고?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보기 드문 미친ㄴ,

 

 

 

 

 "왜.. 불렀어."

 

 

 

 

 혼자 속으로 북 치고 장구 치고 생난리를 펴는데 언제 온 건지 강민희가 서서 송형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잔뜩 수척한 얼굴로 무미건조하게 내뱉은 말이 강민희와 썩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송형준이 울컥했다. 강민희 나쁜 새끼..

 

 

 

 

 "야."

 

 

 "..."

 

 

 "너 왜 그러냐 진짜? 내가 뭐 잘못했어? 말은 해 줘야 알 거 아니야. 혼자 삐져 가지고 말도 안 하고 연락도 안 하고. 뭐 하자는 건데."

 

 

 "...몰라서 물어?"

 

 

 "그럼 말을 안 해 주는데 어떻게 알아 말을 해야 알지! 갑자기 사람을 투명 인간 취급하냐고."

 

 

 

 

 한성깔 하는 송형준이 또, 실수를 저질렀다. 입 밖으로 내뱉고 후회하기를 한참했다. 

 

 

 

 

 "너는 내가."

 

 

 "..."

 

 

 "무슨 생각 하고 사는지 모르지."

 

 

 "..."

 

 

 "나는 너랑 크리스마스에 어디 갈지 뭘 먹을지 네가 뭘 하면 좋아할지 그런 거 생각하기 바쁜데 너는,"

 

 

 "..."

 

 

 "..아니잖아. 만나서 얘기하려고만 하면 게임이나 하고 맨날 투덜거리기나 하고 아 나만 너 좋아하냐고! 나만 너 좋아하는 거 같다고 진짜!!"

 

 

 "..."

 

 

 "나는 맨날 너한테 형준아 형준아 하는데 너는 맨날 야 너 강민희 막 그러고 또 애들이 크리스마스에 놀러가자 한 게 그렇게 좋아? 그럼 나 말고 걔네랑 사귀지 그래? 나는 너랑 놀러 갈 생각만 하고 사는데 진짜, 지친다 형준아 우리...."

 

 

 "..."

 

 

 "..."

 

 

 "..."

 

 

 "잠깐 시간 좀 갖자."

 

 

 

 

 *

 

 

 

 

 어렵사리 뱉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강민희는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왔다. 눈에는 축축한 것이 들어차 있었다. 하아. 그 사이에 추워서 발그레 언 얼굴을 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까 봤던 송형준이 자꾸만 잔상으로 재생됐다. 당장이라도 껴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만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변하진 않았지만 지친 것도 사실이었고, 좋아하는 만큼 더 이상 을의 연애로 상처받기도 싫었다. 무지막지하게 미안하다가도 속 시원했다. 그래서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제발 그냥 너를 사랑할 수만 있게 해 줘 아니,

 

 

 

 

 네 곁에 있을 수만 있게 해 줘, 형준아.

 

 

 

 

 *

 

 

 

 

 "확실히 갈 사람들만 말해."

 

 

 "나!"

 

 

 "야 나도."

 

 

 "나도 감."

 

 

 "오케이 그럼 내가 기차표 끊게 계좌로 돈 보내셈.

 

 

 "어, 야 근데 송이랑 강은?"

 

 

 "난 안 가."

 

 

 

 

 강민희가 말했다. 어찌 되는간에 송형준과의 데이트가 아니라면 크리스마스날 어딜 놀러 갈 기분은 아니었다. 물론 송형준이 끝까지 부산에 간다고 하면, 그래서 결국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면, 어떻게든 같이 있고 싶을 테니까 그때 가서 생각은 한 번 해 보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랬다. 

 

 

 

 

 "강민희 너 요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니까 송형준도.. 둘이 쌍으로 이상함."

 

 

 "둘이 진짜 싸웠냐? 그러지 말고 빨리 화해해라. 엉?"

 

 

 "그래 얘들아 왜 싸우고 그러냐."

 

 

 "아아아 아무튼 화해하는 걸로 하고! 그래서 송형준 저번에 간다고 했었지? 갈 거야?"

 

 

 

 

 강민희와 송형준의 이상한 분위기를 애들이 눈치 못 챘을 리 없다. 이미 작당모의도 여러 번 했는지 사귀느니 커플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쏙 들어간 채로 둘의 관계를 회복시키기에 바빴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강민희와 송형준은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

 

 

 "송형준 갈 거냐니까?"

 

 

 "..."

 

 

 "..."

 

 

 "..어 가."

 

 

 

 

 송형준의 대답에 일순간 강민희의 기분이 나락으로 추락했다. 너는 끝까지, 그렇구나. 이젠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 힘든 마음을 인식할 수도 없었으며 멀어질 대로 멀어진 심연 속 사랑의 감정은 강민희를 포기로 이끌었다. 서서히 검은 이별의 그림자가 들어섰다. 

 

 

 

 

 *

 

 

 

 

 201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가 밝았다. 눈 뜨자마자 폰 화면 깨운 강민희는 머리 잔뜩 헤집으며 한숨을 쉬었다. 요즘 들어 강민희가 부쩍 어두워졌다. 필시 이별에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워지면서, 혹은 이미 도달한 이별을 모른 척하느라 애써서 그럴 테다. 

 

 

 

 

 '[아웃터파크]관람일 D-1안내! 2019-12-25 (수) 20:00 뮤지컬 〈바보사랑〉'

 

 

 

 

 때마침 도착한 메시지에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속에서 놓아 줄 만큼 송형준을 좋아하는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친구 사이를 무릅쓰고 고백도 할 수 있었고. 시험 끝나고 고심 끝에 결정해 예매한 뮤지컬 티켓 두 장을 여지껏 취소하지 못 하는 걸로 봐선 강민희는 송형준을,

 

 

 

 

 바보처럼 사랑했다. 

 

 

 

 

 예매창을 껐다 키기를 반복했다. 취소 버튼을 누르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마치 송형준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는 것만 같아서, 송형준과의 모든 앞날을 취소하는 것만 같아서. 강민희는 도무지 사랑을 그만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송형준에겐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진정 이대로 끝이구나 다 놓아 버리고 싶다가도 간절히 송형준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렇게 또 송형준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순정남 강민희의 하루가 갔다. 

 

 

 

 

 *

 

 

 

 

 시끄러운 캐럴과 함께 요란한 불빛이 아프게 반짝이고 수많은 연인들과 가족들 등 저마다의 사랑으로 가득 찬 크리스마스의 거리에 강민희는 홀로 걷고 있었다. 애초에 송형준이 아니면 나올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당일 취소가 안 되는 티켓이 아까워 어쩔 수 없이 혼자 공연을 보러 왔다. 입맛이 사나웠다. 씁쓸한 기분을 하고 공연장 홀 안으로 들어서서 티켓을 찾았다. 예쁜 봉투 안에는 강민희의 몫과 송형준의 몫이었던 티켓 두 장이 들어있었다. 주인을 찾아가지 못 한 티켓은 애틋한 추억이 아닌 별 볼일 없는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여기저기 연인들의 행복한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귓가를 스칠 때, 강민희는 그저 남겨진 티켓 한 장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공연 시작 전까지 무려 30분 넘게 남은 탓에 캐스팅 보드와 포토존 등 홀을 돌아다니며 티켓 두 장이 보이게 사진을 찍었다. 또 소원 트리에 소원도 적어 붙였다. 그랬는데도 시간이 남아 각자 짝을 가진 사람들이 붐비는 틈에 자리 잡았다. 할 일 없이 폰만 냅다 들여다 보다가 아웃스타그램 스토리에 아까 찍은 사진을 올리고 다른 이들의 일상을 살피는데 부산에 간 애들 소식이 얼핏 보였다. 잽싸게 어플을 종료했다. 사진 속 송형준과 마주하고도 괜찮을 용기가 부족했다. 

 

 

 

 

 혼자 본 공연은 나름 재밌었다. 비록 옆자리는 비었지만 괜찮..기는 무슨. 강민희는 하나도 괜찮지 못 했다. 공연을 보는 내내 주인 잃은 자리를 간헐적으로 넋놓고 바라보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 했다. 주인공들이 떨어져 있다가 껴안아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궁상맞게 눈물을 흘렸다. 송형준 생각이 너무 나서. 송형준이 너무 보고 싶어서. 커튼콜이 끝날 때까지도 주책처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강민희는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공연장 홀로 나왔다. 뭐가 아쉬운지 이미 사람들이 많이 빠진 뒤라 한적해진 홀을 정처 없이 누볐다. 포스트잇이 아까에 비해 눈에 띄게 늘어난 소원 트리 앞에 가 멈췄다. 누군지 모를 이름들 사이에 하트가 적힌 진부한 글자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이것은 송형준을 향한 그리움이겠지. 이젠 그 진부한 거 하나도 송형준이랑 할 수 없다는 게 비통했다, 강민희는. 

 

 

 

 

 아까 공연 보기 전 적었던 포스트잇을 빤히 바라봤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이 몰려 들었다. 한창 바라보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낯선 글자들이 포스트잇 위를 활보했다. 눈을 몇 번 비벼 보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바짝 다가가 포스트잇을 떼었고 이윽고 강민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사실 송형준은 어지간히 충격받았다. 시간을 갖기로 한 날 강민희의 완강한 태도에 자존심도 상했다. 그때 강민희의 표정은 딱 질렸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 표정은 통 잊히지 않고 은연중 끊임없이 송형준을 괴롭혔다. 그날 강민희가 쏟아냈던 모든 불만들은 분명히 납득 가능하다는 걸 송형준도 충분히 잘 알았다. 하지만 막상 미안하다는 말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강민희 안에서 송형준은 이미 그렇게 길들어져 있었다. 진짜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자꾸만 헷갈리게 반대로 나갔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깟 부산 여행 못 간다는 한 마디가 어려웠다. 입만 떼려면 비뚤게 나오는 탓에 심장과 폐부가 온통 텁텁한 모래로 가득 찬 듯 무척 답답했다. 종국엔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크리스마스를 맞았고 정말이지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송형준은 부산 여행에 갔어야 한다. 환불 안 되는 기차표 아까운 줄 모르고 포기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강민희를 더 이상 곁에 둘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문득 든 그런 생각에 애들한텐 미안하지만 너희끼리 가라며 곧장 메시지 하나 띡 보내 약속을 파투내고 봤다. 가만히 침대에 앉아 생각하고 뜸들이다 보니 어느덧 창 밖에선 해가 환각처럼 저물고 있었다. 더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강민희네에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문 앞에 도착해 초인종 누르고 노크하고 10분이 넘도록 별수를 다 써도 묵묵부답인 조용한 집에 급해져서 잠시 망설이다가 강민희에게 전화했다. 여전히 부재였다. 허망해져서는 강민희네 집 앞 계단에 풀썩 주저앉았다. 우리 진짜 끝이구나. 이젠 내가 싫어졌구나. 네가 이렇게 지칠 때까지 난 대체 뭘 한 건지.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둑, 쏟아져 나왔다. 아, 울기 싫은데. 자꾸만 북받치는 감정에, 가빠지는 호흡에, 찡해지는 코 끝에, 별수 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돌연 울리는 알림에 혹여나 강민희인가 싶어서 폰을 열었다. 

 

 

 

 

 an.jm1010: 송 오늘 뭐 해?

 

 

 

 

 기다리던 강민희는 아니었다. 서러워서 소리가 나오는 걸 입으로 틀어막아 끅끅대며 울었다. 짜증나서 읽씹하고 디엠창 나오는데 간절히 그리던 아이디가 눈에 들어왔다. 눈물이 뚝 그쳤다. 강민희 스토리 올렸어? 왜? 딴 새끼랑 재밌게 노나 보지? 나랑은 이제 완전히 끝나서 신경도 쓰기 싫다 이건가? 아님 나 보라고 올린 거야? 팔자 좋네 이 개새끼. 읽으면 아이디 남으니까 읽지도 못 하겠고 씨, 멍하니 화면만 주시하며 고민하는데 이만 손이 미끄러져 버렸다. 강민희 스토리가 화면에 들어차고 폰을 손에서 놓쳤다. 미친놈, 미친놈, 미친 새끼! 그걸 왜 눌러! 머리를 주먹으로 콩콩 때리며 자책하다가 이왕 확인한 거 폰을 들어 바로 마주한 순간, 

 

 

 

 

 송형준은 단숨에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주인 잃은 티켓 주인 잃은 나'

 

 

 

 

 *

 

 

 

 

 폰 화면 뚫어져라 들여다 봐 알아낸 공연장으로 다행이 러닝타임이 끝나기 약 10분 전에 도착한 송형준은 긴장했는지 침을 삼키며 홀 안으로 들어섰다. 뮤지컬 바보사랑. 참 강민희답다는 생각을 했다. 눈을 사로잡는 소원 트리 앞으로 갔다. 몇 자 적어보자 싶어서 포스트잇 한 장을 뜯어 펜을 잡았다. 램프 요정 지니도 아니고 100퍼센트 이루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판국에 괜히 신중해서 오랫동안 번뇌를 거듭하다가 적고 붙일 만한 곳을 찾는데 익숙하게 투박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형준아 보고 싶어

 

 삼백 번 다시 태어나도 사랑할게

 

 

 

 

 별안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바람에 다시 안구에 습기가 찼다. 조심히 포스트잇을 떼어 소중하게 바라봤다. 삼백 번 다시 태어나도 사랑할 거야. 어디선가 강민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엉망이 된 얼굴로 종이가 뚫어져라 응시하는데 공연이 끝난 건지 사람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급히 보던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넣고 자신의 것을 강민희의 온기가 남은 곳에 고스란히 붙였다. 그리곤 한시바삐 사람들이 빠져나오는 쪽에서 강민희를 찾았다. 찾는데,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나오는 사람마다 눈물로 뒤범벅이 된 송형준의 얼굴을 의아하단 듯 쳐다봤고 나오는 사람마다 족족 연인들이었다. 강민희가 느꼈을 쓸쓸함을 생각했다. 불쌍한 강민희, 어디 있는 거야. 사람들이 다 빠진 것 같은데 강민희만 없었다. 설마 극 안 보고 집에 갔나? 그럼 전화는 왜 안 받아? 아 진짜 내가 싫어서? 또 혼자 불길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데, 소원 트리 앞에서 눈에 익어서 지겨울 정도인, 하지만 너무 그리웠던 멀대 같이 큰 놈 하나가 보였다. 조금 전 하던 걱정들을 단숨에 접어 버리고 눈 앞에 보이는 사랑을 향해 무턱대고 뛰었다. 

 

 

 

 

 *

 

 

 

 

 민희랑 꼭 행복하게 해 주세요

                                        -hj-

 

 

 

 

 미쳐 버린 게 아니라면 틀림없는 송형준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포스트잇을 쥐고 망부석마냥 굳어 있다가 번쩍 든 정신에 주변을 살피려 뒤를 돌았다. 그때,

 

 

 

 

 "야아 강민희!"

 

 

 

 

 집 나간 주인이, 아니 집 나간 강아지가 왕왕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얼굴엔 눈물 콧물 달고서. 모든 것이 벅차오르며 와락 서로를 껴안았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향기와 촉감이 강렬하게 반겼다. 맞닿은 심장만큼이나 뜨거운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강민희는 송형준에게로, 송형준은 강민희에게로 밑도 끝도 없이 전락하는 때였다. 비로소 행복한 메리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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