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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빨리 오라고오. 강민희!”

 

복도에 잔망스러운 발소리가 울렸다.

 

“어우, 속 터져.”

 

형준이는 익숙하게 민희의 손에 들린 실내화 가방을 빼앗듯이 제 쪽으로 가져왔다. 민희는 그런 형준이를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송형준이 한숨을 포옥 내쉬더니 기어코 강민희의 책가방까지 가져와 제 자그마한 어깨에 얹었다. 초등학교 3학년. 누가 누굴 챙길 수나 있는 나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송형준은 강민희를 그 누구보다도 살뜰히 챙기고 있었다.

 

강민희를 향한 송형준의 보살핌은 역사가 깊다. 열여덟에 십팔 년차 친구면 말 다했지 뭐. 송형준은 무엇이든 빨랐고, 강민희는 무엇이든 느렸다. 형준이는 민희보다 빨리 첫 옹알이를 했고, 민희가 겨우 기어다닐 때 자리에서 일어나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한글을 빨리 뗀 것도 형준이. 앞니가 먼저 빠진 것도 형준이. 알파벳을 먼저 뗀 것도 형준이.

 

형준이는 항상 민희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그것뿐이겠는가. 강민희 깡말랐어, 몸도 약해, 맨날 코 찔찔거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시킨 적이 없음에도 강민희의 가방 셔틀을 자처한 송형준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한 번은 강민희가 두들겨 맞고 왔다. 코찔찔이 주제에 자존심은 더럽게 세서 형준이가 하루 종일 옆에 붙어서 누구냐고 물어도 입 열 생각을 안 했다.

 

하지만 형준이는 그때도 노빠꾸였고 민희가 감기로 결석계를 낸 그 하루 동안 학교를 헤집고 다녔다. 송형준은 강민희네 반에서 제일 힘 세고 무서운 친구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덩치 큰 친구들 앞에서는 살짝 꿀리는 키였지만 깡으로 버텨 보기로 했다.

 

“야, 김지원! 너지. 강민희 때린 거.”

 

“맞으면 어쩔 건데.”

 

“뭐?”

 

형준이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따져 묻자 지원이도 할 말이 없는지 눈만 요리조리 피하다가 놀릴 거리가 생각난 건지 주변에 있던 친구들과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키 큰 친구들 몇 명이 자기 쪽으로 다가오자 송형준도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때리면 어떡하지? 애써 용맹한 표정으로 친구들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다리가 달달 떨렸다.

 

“야. 너 강민희 좋아하냐?”

 

“얼레리꼴레리. 송형준이랑 강민희랑 사귄대요."

 

“송형준이랑 코찔찔이랑 사귄대요.”

“강민희랑 안 사귀거든!"

 

그 말을 끝으로 송형준이 선빵을 쳤고 당연하게도 배로 얻어 터졌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아픈 티 한 번을 안 내고 끝까지 화난 고슴도치마냥 씩씩거렸다. 반 친구들 손에 붙들려 보건실에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선생님과 단둘이 남은 보건실 안의 공기가 어찌나 어색한지.

 

“매일 친구 약 대신 받으러 오더니. 오늘은 왜 너야.”

 

보건 선생님이 형준의 볼을 소독약을 묻힌 솜으로 톡톡 두드렸다.

 

“어……. 넘어져서요.”

 

“넘어지기는.”

 

밴드를 꾹 눌러 붙이며 솔직히 말해 보라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집요함에 송형준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싸웠어요.”

 

“왜? 너 얌전하고 착하다고 선생님들이 칭찬하시던데.”

 

“아, 걔가 먼저 강민희한테!”

 

송형준 왕방울만한 눈에 눈물이 막 고이려고 했다.

 

“그리고 강민희 좋아하냐면서 막 놀렸단 말이에요. 둘이 사귄다면서.”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안 사귄다고……."

 

안 사귄다고 했죠. 안 사귀니까. 송형준이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하다가 얼굴에 열이 확 오른 채로 급하게 보건실에서 빠져 나왔다. 선생님은 연고와 반창고를 정리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순정이 다 있네. 죽어도 안 좋아한다는 말은 안 하는 거 봐. 그 날 이후로 송형준은 강민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몇 년을 의식하며 지내면서도 솔직히 이게 좋아하는 게 맞나 싶었다. 이거 혹시 막, 모성애나 부성애 그런 건가? 강민희 때문에 밤을 꼴딱 새버린 날도 적지 않았으나 늘 결론은 똑같았다. 내일 강민희한테 엽떡 먹자고 해야지.

 

강민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시기를 기점으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하더니 쉽게 송형준의 키를 따라잡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어느새 형준은 고개를 들어 민희를 보는 것에 익숙해졌고, 중학교 3학년이 되자 또래 아이들과 있을 때 눈에 확 튈 정도로 혼자 쑥 올라와 있는 강민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민희에게 많은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럴 때마다 송형준은 괜히 짜증이 났다. 코찔찔이라고 놀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뭐, 이제 와서 잘생겼대.

 

원래 반반하게 생긴 건 맞지만. 송형준은 별 생각 없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강민희를 바라보며 귀를 붉혔다.

 

‘와, 송형준. 진짜 미친 거 맞지.’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형준이만의 귀여운 코찔찔이는 남강고 프린스라는 호칭을 얻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강민희 좀 놀려 보겠다고 붙인 별명이었는데 옆 학교까지 소문이 퍼질 줄은. 덕분에 형준은 각종 기념일마다 맥을 못 추렸다. 아무래도 송형준이 온 동네에서 '강민희랑 같이 다니는 걔'로 통하는 모양이었다. 그 날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처음 맞는 화이트 데이였고, 송형준 양손 가득 들려 있는 종이 가방을 보고 강민희는 송형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야, 형준아. 너 이거 다 뭐냐?”

 

강민희는 키가 훌쩍 커버린 뒤로 송형준을 살뜰히 챙기기 시작했다. 동생 취급을 하고 싶다나 뭐라나. 챙겨 주고 싶고 귀엽다는 말은……. 아마 빈 말인 것으로 추정. 송형준은 그럴 때마다 형 노릇을 하려고 드는 강민희가 한심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송형준 피셜 귀여운 건 코딱지 만큼.

 

“우리 형준이 언제부터 이렇게 인기가 많아졌어!”

 

형준이가 민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뭐 씹은 표정으로 민희에게 종이 가방을 떠밀다시피 안겨 주었다. 코찔찔이 용 됐네 아주.

 

“너 주래.”

 

나? 민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종이 가방들을 하나하나 열어 봤다. 한참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더니 갑자기 강민희가 얼굴을 막 식혔다.

 

“누가 준 건데?”

 

송형준이 고개를 쭉 빼고 강민희 앞에 놓인 막대 사탕을 톡톡 건드렸다. 민희가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십칠 년 평생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송형준은 갑자기 초조해졌다. 뭐지?

 

“권지아. 옆학교에 내가 귀엽다고 했던 애 있잖아. 오, 번호 적어 줬다. 저장해야지.”

 

이건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송형준이 차가운 책상에 머리를 대고 눈물을 꾹 참았다. 형준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과 민희 사이에 다른 사람이 비집고 들어오는 상황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민희는 첫 연애를 시작했다. 민희와 형준의 등굣길과 하굣길에 자연스럽게 민희의 여자친구가 함께하면서 송형준은 하루의 시작과 끝에 인생의 쓴맛을 맛보았다. 민희와 지아는 항상 형준이를 가장 바깥쪽에 둔 채 손을 잡고 걸었고, 덕분에 송형준은 폰에 고개를 박고 걷는 습관이 생겼다.

 

“야, 형준아. 차 온다.”

 

강민희는 첫 연애에 들뜬 와중에도 송형준을 챙기려 들었다. 뒤에서 차가 오면 형준의 어깨를 감싸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기기도 하고 넘어지려고 하면 팔을 붙잡아 일으켜 주기도 했다. 민희는 눈치가 더럽게 없었고, 종종 송형준과 자신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얘가 미쳤나? 미묘하게 표정이 굳는 지아를 보고 송형준이 급하게 대화 주제를 갈아 엎는 일이 몇 차례 반복되고 나자 형준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야, 나 내일부터 독서실 다닌다. 아침에도 학교 일찍 올 거니까 이제 권지아랑 둘이 다녀.”

 

남들이 보기에는 친구의 연애를 응원하기 위해 자리를 피해 주는 바람직한 행동이었겠지만 송형준은 그저 강민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붙어 있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 그 와중에 여자친구가 옆에 있는데도 자신을 챙기는 강민희의 모습에 기분이 붕 떴던 자기자신에 대한 죄책감도 형준이 자리를 피하는 데에 한몫했다.

 

강민희는 내가 고백했어도 받아 줬을까? 그런 생각이 든 뒤로 송형준은 오랜 시간 부정했던 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러면서 안 좋아한다고 하면 양심 없는 거지.

 

아침에 학교에 함께 가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하교하기 전까지의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매점에 가서 메론빵이랑 바나나 우유를 사먹고, 다른 친구들을 끼워서 급식도 같이 먹었다. 강민희가 3월 자리 그대로 1년 쭉 가자고 박박 우기는 바람에 두 사람은 달이 지나도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송형준은 굳이 마음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강민희가 여자친구와 헤어지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사귀고 싶은 마음보다는 곁에 오랜 시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강민희가 연애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질투가 나면서도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송형준은 생각했다. 연애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진짜였구나.

 

어느새 가을이다. 그 날은 송형준이 조금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밤을 새고 학교에 와도 고개 한 번 안 꾸벅거리는 애가 4교시가 되도록 담요를 끌어안고 엎드려 있는 것이다.

 

“야, 형준아. 밥.”

 

민희가 책상에 엎드려 형준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코입 다 동글동글.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지 않기에 차가운 손을 볼에 대 봤지만 미동이 없다. 뺨이 따끈했다. 복슬복슬한 앞머리를 잠시 걷어 이마에 손을 대 보니 열이 펄펄 끓었다. 강민희가 마이를 벗어서 송형준 어깨에 살포시 내려 놓았다. 앞머리를 정돈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게 느껴졌는지 그제서야 송형준이 눈을 천천히 떴다.

 

“보건실 가자.”

 

송형준은 영문도 모른 채 비몽사몽한 상태로 강민희 등에 업혀서는 따끈한 볼을 민희의 어깨에 문질렀다. 송형준이 약 기운에 취해 보건실 침대에서 잠을 청할 때까지 민희는 그 곁을 지켰다. 형준이가 으슬으슬하게 느껴지는 공기에 이불을 끌어안고 코를 훌쩍거리는 와중에도 민희의 시선은 휴대폰에 꽂혀 있었다. 또 지아랑 연락하나? 맞다. 오늘 200일이랬지. 형준이는 잠결에 괜히 심통이 나서 민희 손 한 쪽을 끌어 당겨 깍지를 꼈다. 형준이는 7교시가 끝날 무렵 잠에서 깨어났다. 강민희는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수업을 들으러 교실에 올라간 모양이었다.

 

형준이 민희가 두고 간 마이를 어깨에 두르고 천천히 교실으로 향했다. 죄송합니다아. 형준이 수업 중간에 뒷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강민희가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원래 대놓고 자는 애는 아닌데. 형준이 민희를 깨우려고 등을 두드리려는 찰나 친구가 저 앞자리에서 팔으로 엑스자를 그렸다. 송형준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친구가 선생님 눈치를 한 번 봤다가 몰래 말을 전했다. 형준은 친구의 입모양을 읽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민희……. 강민희 차였어."

 

형준이는 자기 입으로 말하고도 믿기지가 않아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엎드려 있는 민희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미친. 강민희 차였다고? 형준이가 되묻자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희는 7교시 수업이 끝나고 종례를 마칠 때까지 미동도 없다가 송형준이 가방을 챙기기 시작하자 자기도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형준아. 같이 가.”

 

“어어, 그래.”

 

독서실 핑계를 대려고 해도 며칠 전에 독서실 등록 기간이 끝났다고 말해버린 탓에 소용이 없었다. 형준은 지금껏 민희가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헤어졌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되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오늘은 같이 가고 싶지 않았는데. 강민희는 생각보다 충격을 많이 받은 모양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딜 자신이 없어 송형준이 조심스럽게 침묵을 깼다.

 

“야……. 괜찮냐?”

 

“어엉.”

 

막상 말을 걸어 보니 강민희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야, 형준아. 너는? 열 떨어졌냐?”

 

강민희가 갑자기 고개를 들이 밀더니 송형준 이마에 손을 대고 얼굴까지 요리조리 살폈다. 덕분에 옅게 달아오른 형준의 뺨에 두 손을 감싸고 눈을 동그랗게 뜬 민희. 송형준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강민희를 약하게 밀어냈다.

 

“아, 강민희! 뭐 해.”

 

“너 또 열나는 것 같은데.”

 

민희는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대더니 기어이 형준의 집까지 따라 들어왔다. 강민희는 아직 열이 있는 것 같다며 송형준을 억지로 침대에 눕혀 놓고 이불까지 꼭꼭 덮어 주었다. 평소 같으면 미쳤냐고 욕 한 번 때려 박았을 송형준이지만 강민희가 차인 지 몇 시간 되지 않은 것을 감안해서 얌전히 있기로 했다.

 

“강민희. 근데 왜 헤어졌어?”

 

송형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돌려 바닥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는 강민희를 바라봤다. 민희는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 놓고 잘 모르겠다는 듯 뒤통수를 벅벅 긁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몰랑. 성의 없는 대답에 형준이 고개를 저었다. 저러니까 차이지.

 

“너는 차여도 200일에 차이냐.”

 

“아니. 너 아까 많이 아파 보이길래 오늘 못 만날 것 같다 그랬지.”

 

태연하게 말하는 강민희를 보고 송형준 입이 떡 벌어졌다. 진짜 미쳤구나……. 형준이가 몇 번 중얼거리다가 다시 천장을 보고 누웠다. 돌이켜 보면 강민희는 휴대폰 붙잡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연애하는 티를 거의 내지 않았다.

 

“그러게 주말에 데이트 좀 하랬지.”

 

“걍 너랑 있는 게 더 재밌는디.”

 

장난기 가득한 말투에 송형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야…….

 

“너 겨울왕국도 나랑 먼저 약속했다고 안 보러 갔다며.”

 

“어엉. 너 그거 몇 달 전부터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도 강민희 덕분에 겨울왕국도 개봉하자마자 보고 주말마다 재미있게 보냈으니까……. 늘 내가 먼저면 그냥 나랑 연애하면 되는 거 아닌가. 송형준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불을 얼굴 끝까지 뒤집어쓰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혹시 강민희도 나 좋아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송형준은 기대를 저버렸다. 한 번 사귀어 보니 시동이 제대로 걸렸는지 강민희는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얼마 못 가 헤어지는 걸 보니 한동안 잠잠하겠거니 했지만 민희는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짧은 연애를 반복했다. 덕분에 옆에 있는 송형준은 아주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2월, 1학년 봄방학이 되기 직전 강민희는 모처럼 연애를 쉬고 있는 상태였다. 한창 영화를 틀어 놓고 떠드는 어수선한 시기라 송형준은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잠시 눈을 붙였다. 옆에서 강민희와 반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형준은 다시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가 친구들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기울였다.

 

“야, 강민희. 근데 너 취향 존나 한결같은 거 알지.”

 

“잉? 뭐가.”

 

“아니. 너랑 사귀었던 애들 다 비슷해서.”

“아, 맞어. 나만 느낀 줄.”

“약간……. 강아지상?”

 

“잉?”

 

강민희 반응 한결같은 거 봐. 송형준은 책상에 머리를 두고 엎드린 채로 피식 웃었다. 친구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구는 민희가 답답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야, 강민희. 내가 너 이상형 맞춰 본다.”

 

“어엉.”

 

강민희는 별 관심이 없는지 겨우 대답만 하면서 휴대폰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단 강아지상. 이건 인정해라.”

 

“엉. 강아지상 귀엽지.”

 

“좀……. 눈 크고.”

 

“그것도 맞는 듯.”

 

“키 좀 작고?”

 

“어엉.”

 

“약간 송형준 느낌.”

“야, 맞네. 송형준.”

 

“잉? 뭐래.”

 

“이정도면 송형준 닮은 애 골라서 사귀는 거 아니냐?”

 

순간 휴대폰을 두드리는 강민희의 분주한 손이 멈췄다. 민희는 휴대폰 화면을 끄고 엎드려 있는 송형준을 힐끔 쳐다봤다. 강민희가 웃음기를 싹 빼고 송형준의 어깨에 제 패딩을 덮어 주면서 친구들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다음 목소리를 낮추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야. 형준이 깨면 어떡하려고.”

 

처음 들어 보는 강민희의 목소리에 송형준이 눈을 땡그랗게 떴다. 고개를 돌려 강민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아 눈만 뜬 채로 숨을 죽였다. 민희의 눈에 송형준의 뒤척임과 함께 작게 팔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눈에 들어왔다. 강민희는 송형준이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에 형준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제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가 이내 형준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끼워 넣었다. 송형준이 아무 말 없이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실어 강민희의 손을 붙잡았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길을 헤매는 일이 잦다. 먼 길을 돌아 결국 사랑에 도달했다 할지라도 그 형태가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감정이 무르익을 시간이 필요하다.

 

봄이 돌아왔다. 어김없이 둘만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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