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애
형준은 제 고사리같은 손을 도망갈세라 꽉 붙들고 있는 중년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찌나 힘을 주고 잡았는지 형준이 손이 아파 조금이라도 꼼지락거리면 고개를 홱하고 돌려 무서운 기세로 가만히 있어라고 말을 하고는 다시 앞을 쳐다봤다. 중년의 남자는 긴장이 되는지 형준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쪽 손을 자꾸만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형준은 왜 자신이 딱 봐도 돈 많아 보이는 집의 대문에 와 있는지 모르겠고 어머니가 울면서 제 옷들 중 그나마 멀쩡한 옷을 입혀주고는 "아이고 불쌍한 내새끼... 부모 잘못 만나서 어릴 때부터 고생을 하는구나" 하며 우는 이유를 몰랐다. 형준이 할 수 있는 건 조그마한 손으로 어미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며 울지마요라고 말 하는 거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입술을 이로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문이 벌컥 열리고 아버지 되는 사람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차려 입은 모습이 형준이 알고 있던 모습과 이질감이 들었다. 입만 열면 폴폴 풍기던 술 냄새도 안 나고 손에 베인 담배 냄새도, 노름도 하러 안 가고 마치 하루 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았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벌벌 떨리는 손으로 겨우 초인종을 눌렀다. 부잣집 초인종은 소리부터 다르구나라고 형준은 생각했다. 안에 사람이 없는지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가자하면서 형준의 손을 강압적으로 이끌고 갈려던 찰나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남자가 형준을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자 영문을 모르는 형준은 순순히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고르게 정리된 흙바닥을 신기하다듯이 보고 있는 형준의 뒤에서 "이 아이인가요?" 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런 목소리에 형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뒤돌아서 여인을 바라보자 여인은 안쓰러운 듯 형준을 바라보며 복슬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색바란 한복에 소매끝은 헤져있었다. "베타인 건 확실하죠? 여기 몸값이요." 여인이 멋스러운 주머니를 남자에게 건냈다. 돈이 들어있는 건지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하죠. 저희 집에 오메가라곤 아내밖에 없어요. 얘 위로 있는 누나들도 다 베타인걸요" 남자는 곧바로 주머니를 털어 손바닥에 갯수를 세더니 맞는지 급하게 주머니에 돈을 넣다가 손떨림으로 인해 동전을 떨어트렸다. 누가 가져갈새라 빼입은 바지는 생각 안 하는지 무릎을 꿇고는 질질 끌고 다니면서 동전 줍기에 급급했다. 동전을 다 주웠는지 일으켜세운 무릎은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개의치 않는지 주머니 속 동전을 보며 어른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눈만 데굴거리고 있는 형준에게서 멀어졌다. 형준은 자신을 놔두고 가버리는 아버지가 당황스러워 따라가려 하자 형준의 팔목을 붙잡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여기서 지내야 한단다" 포근함이 담겨있는 목소리에 형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지더니 엄마하며 소리를 죽인 채 끅끅거리며 울었다. 8살의 형준은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자신이 이 집안의 소유물이 되었다는 걸. 우는 형준을 꼭 안아주어 달래주던 그녀는 형준의 울음소리가 잦아드는 거 같아 형준의 손을 잡고 넓은 마당을 가로지르며 물어보았다.
" 몇 살이니? "
" 8살이요. "
" 민희 도련님과 나이가 같구나. 그럼 너는 민희 도련님에게 붙어줘야겠구나. 도련님은 알파란다 너는 베타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구나. "
형준은 자신의 손을 감싸쥔 여인의 손을 바라보았다. 잦은 궂은 일때문인지 손이 거칠거칠했지만 따스했다. 형준은 미안하다며 자신을 안고 펑펑 울던 어머니가 생각나 코끝이 찡해졌지만 울지는 않았다. 형준은 이 낯선 세계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집안에 들어서자 형준은 입을 크게 벌리고는 신기하다듯이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할 일을 하며 돌아다녀도 공간이 넉넉해보였다. 그런 형준의 반응이 귀여운지 여인은 작게 웃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위층 역시 넓직했고 방도 여러 개였다. 형준은 아직 들어간 적 없지만 분명 제 집보다 더 넓을거라고 생각했다. 여인이 한 방문 앞에 멈춰 서더니 똑똑하고 노크를 했다. 우당탕하는 분주한 소리가 방 안에서 들리더니 잠시뒤 "들어와"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이 문을 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형준 역시 여인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뒤에 몸을 숨긴 채 방으로 들어왔다. "이번에 새로 도련님 전담이 될 아이에요." 그게 둘의 첫만남이었다. 형준은 민희를 마주했을 때 때깔 곱네, 나랑은 다르게. 라고 생각했다. 꼬질꼬질한 자신과 반질반질한 민희가 괜시리 미웠다. 형준의 하루 일과라곤 아침에 민희를 깨우고 등교한 민희의 방을 청소해주고 하교한 민희와 노는 거뿐이었다. 형준은 이미 이 생활에 적응했다. 허드렛일을 배우며 제 또래였던 민희의 말동무 노릇을 했다. 매번 아침잠 많은 민희를 깨우는 게 힘들었지만 이를 빼면 형준은 나름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처음엔 자신을 이 집에 팔아넘긴 제 아비가 미웠지만 지금은 차라리 이 생활이 낫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시종이 아닌 친구처럼 대해주는 민희가 한 몫했다. 민희가 숙제를 하고 있으면 옆에서 구경하던 형준은 손글씨에 재능이 있는지 반듯반듯하게 민희가 쓴 걸 따라 쓰고는 뿌듯한 표정으로 민희에게 보여주면 민희 역시 웃어보였다. 8살의 둘에게 서로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13살이 될 무렵 형준은 완전히 지금 생활에 적응했다. 나이가 차서부터 민희의 시중을 도맡았다. 민희야 일어나하면 자동반사로 5분만 하는 민희를 좌우로 흔들어 기상시키고는 주인 없는 방을 정리해주고 민희가 학교에서 오면 같이 놀고. 평소와 다름 없이 꺄르르거리며 놀고 있었는데 소리가 방에서 새어나갔는지 이 소리를 들은 민희의 아버지가 둘을 혼냈다. 특히 형준은 더 혼났다. 민희는 친구가 아닌 도련님이니 다시는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그때부터 형준은 민희와 자신은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이후로 형준은 잘 불러주던 이름도 안 부르고 말 끝마다 꼭꼭 도련님 호칭을 붙여 말했다. 민희는 처음에 심하게 혼나서 그런가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도 이름을 안 불러주었다. 원래라면 민희가 하교하고나서 민희의 방에서 노는 일이 당연지사였는데 형준은 "도련님 오셨어요." 하며 민희를 반겨주고 제 할 일을 하러 갔다. 형준이 민희의 방에 들어올 때는 아침에 민희를 깨우러 올 때뿐이었다. 요새 형준은 아침에 민희의 방에 들어오면 화한 박하향이 형준의 코를 간질거렸다.
" 왜 요즘은 내 이름 안 불러줘? 나랑 잘 놀아주지도 않고 변했어 너. "
" 제가 어떻게 도련님을 이름으로 불러요. "
안 쓰던 존댓말도 쓰니 민희도 나름대로 오기가 생겼다. 민희가 내 이름 불러 이러면 형준은 민희 도련님 하고 맞받아쳤다. 13살의 소년들은 유치했다. 13살의 민희는 요새 형준에게서 달큰한 향이 나는 거 같아 형준의 목 근처에서 킁킁거리면 형준은 민희의 머리칼때문에 목 언저리가 간지러워 "도련님 간지러워요." 하며 민희를 밀어낼 수는 없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를 길러준 유모에게 형준에게서 달짝지근한 향이 난다고 말을 해도 유모는 형준은 베타라 아무 향도 안 난다고 말했다. 민희는 제 집 뒷마당에서 나는 꽃향기와 착각한거라고 생각했다. 어른들 아무도 모르는 민희만의 비밀 공간에 혼날까봐 걱정하는 형준에게 민희는 기세등등하게 자기가 막아주겠다며 비밀 정원에 데리고 갔을 때 그 순간을 민희는 잊을 수가 없다. 살랑거리는 봄 바람이 불어온 꽃내음과 형준에게서 나는 단 내가 코끝을 간지럽히고 자신을 바라보며 방긋 웃어보이는 형준을. 민희는 심장이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지금 18살의 형준은 민희의 몸종 노릇을 하고 있다. 형준은 요새 자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민희랑은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라고 생각하는데 언젠가부터 민희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잘생겼고, 똑똑한 우리 도련님. 10년간 형준이 모셔온 도련님은 해가 다르도록 점점 잘생겨지더니 지금은 이 지역 일대에서 제일로 가는 멋쟁이다. 아니, 어쩌면 저 먼 경성에서도, 동경에서도 민희만큼 잘생긴 사람은 없을거다. 형준이 민희 얼굴을 빤히 보면서 어릴 때도 예쁘더니 지금도 예쁘긴 겁나게 예쁘네 이 생각을 하고 있으면 민희는 마치 형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웃으며 "형준아 무슨 생각해?" 얼굴을 형준에게 들이밀면서 말했다. 형준은 갑작스런 가까움에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며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귀끝은 붉어져있었다. 뽀얀 뺨도 붉게 물들었다. 민희는 "형준아 너 어디 아파? 얼굴이 빨개." 하며 그 큰 손을 형준의 볼에 갖다대더니 얼굴이 뜨겁다며 열 나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민희의 얼굴을 못 보겠어서 빠져나오고 싶어도 민희에게 단단히 잡혀버린지라 형준은 그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민희의 시선을 피하는 게 다였다. 형준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민희는 아침에 깼으면서 자는 척 한 게 한 두번이 아니다. "도련님" 하며 깨우러 오는 형준의 목소리가 좋아서 조심스럽게 자신을 깨우는 형준의 손길이 좋아서. 하루는 눈빛이 교차하는 데 찌르르하고 오는 느낌에 둘 다 분위기에 휩쓸려 키스했다. 민희에게 뒷목이 잡힌 채 형준이 키스를 하며 한 생각은 '염병 얼굴도 잘하고 머리도 똑똑한 놈이 이것도 잘하네'였다. 그게 형준의 첫 키스였다. 입에서 마치 박하사탕을 머금은듯 화한 박하향이 맴돌았다.한 번이 어렵지 두 세번은 쉬웠다. 처음을 계기로 약속이라도 한듯이 몰래몰래 붙어먹고 원래는 하루에 한 번이 암묵적 동의였는데 요즘은 민희가 한 번만 더하자 해서 두 번 세 번도 한 적있다. 형준이 숨차면 민희의 어깨를 콩콩친다. 원래였으면 그만두는데 이제는 잠시 입 떼서 형준이 숨 돌릴 틈만 주고 다시 키스한다. 열여덟의 둘은 뜨거웠다. 뜨겁다못해 지옥불에 담궈진 거처럼 아팠다. 형준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는 끙끙거렸다. 형준의 방아 복숭아향으로 가득찼다. 아침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형준은 겨우 민희를 깨웠다. 누가 봐도 상태가 안 좋아보였는지 민희는 학교를 가야하는데도 형준이 걱정이 돼 발걸음을 못 떼고 있자 형준이 대문 앞까지 민희를 배웅해주며 "도련님이 학교에 늦으면 저만 더 혼나요" 라고 말하자 민희는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말고 쉬고 있어 알겠지?" 다정한 목소리로 형준의 이마와 볼을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손으로 한 번씩 번갈아 대주고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데도 자꾸 힐끔힐끔 뒤돌아봤다. 형준은 민희가 단단히 일러났는지 아무도 형준에게 허드렛일을 시키지 않았다. 형준은 아까 민희가 손을 댄 볼에서 미미하게 나는 박하향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제 몸 장점 하나는 아프지 않는거라 생각했는데 처음 느껴보는 아픔에 눈물까지 찔끔 나는 거 같았다. 형준은 이젠 얼굴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아 흐릿한 엄마가 보고 싶었다. 민희는 학교에서도 영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형준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잠시 형준의 이마와 볼을 손을 댔을 뿐인데도 손에서 연한 복숭아향이 감돌았다.
민희는 세차게 자전거 페달을 돌렸다. 야구 하자며 붙잡는 친구들에게 "미안." 하고는 부랴부랴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미미한 복숭아 내음이 코를 간지럽혔다. 착각이 아니라고 민희는 생각했다. 문을 열자마자 훅하고 폐부를 찔렀다. 불행 중 다행인건지 저택의 하인들은 다 베타여서 단 내를 알파인 민희만 알아차렸다. 지나가는 하인을 붙잡고 형준의 행방을 묻자 도련님 말 대로 아파보여 방에서 쉬라고 보냈고 많이 아픈지 밥도, 죽도 한 입도 먹지 않았다고 했다. 우당탕거리며 계단을 올라가 형준의 방문을 열자 달다 못해 입안이 아릴 정도의 복숭아가 민희를 덮쳤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누가 들어올새라 문을 닫고 잠근 후 이불보를 뒤집어 쓰고 앓고 있는 형준에게 다가갔다. 형준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진한 향이 느껴졌다.
" 형준아. 많이 아파? "
민희의 물음에도 형준은 듣지 못했는지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민희 역시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은 처음인지라 어찌할 방도를 몰라 안절부절하다 제 엄마 방에 억제제가 있다는 게 생각나 가지러 가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형준이 민희의 팔목을 잡았다. "가지마." 목이 많이 잠겼는지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이불에 파묻혀있던 형준의 얼굴을 본 민희는 심장이 쿵하고 떨어진 거 같았다. 열꽃이 핀 볼에 울고나서 문질렀는지 붉어진 두 눈가. 민희는 고개를 도리질 치고는 형준의 손을 떼어내려고 하자 그 손마저도 형준이 몸을 일으켜 잡아왔다. "형준아 약 안 먹으면 더 아파. 약 가지고 올게." 민희의 말에 형준은 못 들은 척 아직 냉기가 남아있는 민희의 손을 제 볼에 갖다대고는 시원하다며 손바닥에 볼을 문질거렸다. 그런 형준의 행동에 민희는 눈만 꿈벅거리며 얼어붙은 것마냥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형준은 열 때문인지 민희의 페로몬 때문인지 반쯤 넋이 나가보였다. 점점 민희에게 다가오더니 먼저 입을 맞추고는 박하사탕을 먹은 듯이 입술을 머금고 있었다. 조금씩 핥기도 했다. 민희는 복숭아향에 잠식돼 이게 현실인건지 도원경인건지 정신이 흐리멍덩해졌다. 코끝이 마비가 온 것마냥 저릿했다. 입술을 맞댄 채 민희는 형준을 뒤로 눕히고는 키스했다. 혀를 깨물면 복숭아가 녹아들 거 같았다. 입안이 녹아 내리는 거 같았다. 민희는 형준의 밑을 실오라기 없이 벗기고는 손가락을 구멍 근처에서 배회했다. 이미 눅진하게 풀어져 있어 손쉽게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넣어 안에서 움직이니 정신이 들었는지 형준이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억눌린 신음을 냈다. 눈에서는 방울방울 눈물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민희가 다른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아파? 그만할까?" 라고 묻자 형준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꿈속에서나 보던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형준은 제가 아파서 헛것을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열기운이 가신 걸 확인한 민희는 형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억제제를 챙기러 갔다. 그제서야 형준은 헛것이 아님을 깨닫고는 얼굴이 홧홧하고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방금 전 민희에게 엉엉 울며 매달린 자신이 생각나 이불 밑으로 숨자 약을 챙겨오던 민희는 또 형준이 아픈가 싶어 부랴부랴 곁으로 가 아프냐며 이불을 걷어 내리려 하자 형준이 이불을 꾹 잡으며 "도련님... 저 이제 괜찮아요 약은 옆에 두고..." 라고 말하자 형준이 부끄러워한다는걸 알아차린 민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장난기가 담긴 말투로 "아까는 민희야민희야 하면서 이름 잘만 부르더니 지금은 도련님이라고 부르네. 약 여기다 두고 갈게 챙겨먹어." 만족스레 웃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형준이 푸하 소리를 내며 이불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침대 옆 선반에 억제제 한 알과 물이 찰랑거리며 담긴 컵이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형준은 더더욱 민희 얼굴을 보지 못했다. 민희를 피해다니고 싶었지만 자신이 민희의 몸종이라는 처지가 유난히 더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런 형준을 잘 아는 민희는 모르는 척 해주었다. 형준이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건 둘만 아는 비밀이었다. 민희는 형준에게 페로몬 조절하는 법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다 알려주었다. 민희는 8살 그때로 돌아간 거 같아 연신 웃음을 터뜨리면 형준은 그런 민희를 살짝 흘기다가 이에 자신도 웃어보았다. 민희의 아버지는 13살 때 일 때문에 바빠 집에 잘 안 들어오시더니 아예 경성에 자리 잡으시더니 사업이 잘 되는지 집 앞으로 부쳐지는 돈의 액수가 점점 눈덩이처럼 불었다. 형준은 자신이 이 집에 팔려올 때 유흥비 5전에 팔려온 게 생각이 나 착잡한 듯 이번에 온 서신을 내려다 보았다. 돈이라고 하기에는 두께가 얇은 거 같다고 생각하며 민희에게 건네주었다. 민희가 봉투를 뜯고 안에서 꺼낸건 편지였다. 민희는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가다가 인상을 팍 쓰더니 편지를 구기고는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던져버렸다. 형준은 '갑자기 왜 저래' 하며 편지를 주워 버리려다 호기심이 생겨 책상에 여전히 앉아있는 민희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펼쳐 읽어내려갔다. 제일 먼저 형준의 눈에 들어온 단어는 혼사였다. 형준은 두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내려다보다가 뒤에 민희가 다가왔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민희는 형준의 손에 들린 편지를 낚아채더니 쓰레기통에 버렸다. 싸해진 방 분위기를 풀기 위해 형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도련님 혼인 축하드려요."라고 하자 민희는 담담한 어조로 고맙다고 말했다. 형준이 슬그머니 민희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혼사라는 글자가 형준의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혼인을 한 민희가 이제 아가씨가 될 그 사람과 저와 하던 것처럼 키스를 하고 그보다 더한 것도 하고 그 후엔... 형준의 눈가에 물기가 가득했다. 형준은 자신이 왜 눈물이 나는지 가슴이 싸아하고 아픈지 그 이유를 몰랐다. 기어이 울고만 형준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편지를 보내고 얼마 안 있어 민희의 아버지가 본가로 내려왔다. 형준은 민희에게서와 같은 페로몬향이 나는 거 같아 코를 킁킁댔다. 저녁식사를 하는 가족의 모습은 냉랭했다. 민희가 젓가락을 탁하고 내려놓고 방으로 가려하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 혼인은 며칠 뒤에 있을거다. 부인 될 사람은 높으신 분 막내딸이시니 너가 잘... "
" 안 할거에요. "
" 너가 안 하고 싶다고 말해도 이미 다 끝낸 이야기야. "
민희는 늘 고분고분하게 부모님 말을 들어왔다. 시키면 군말없이 해오던 그런 아들이 반항 아닌 반항을 하니 알파 사이에 낀 형준과 민희 어머니만 죽을 맛이었다. 민희는 버거워 보이는 형준을 슬쩍 보고는 방으로 가려하자 아버지가 어른이 얘기하고 있는 데 버르장머리 없이 어딜 가는 거냐며 민희의 뺨을 때렸다. 고개가 돌아간 민희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버럭하는 큰소리와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준은 눈치를 보다가 빠져나와 민희의 방으로 갔다. 분명 혼자 땅굴을 파고 있을게 분명했으니까. 굳게 닫혀 있는 방문 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도련님. 들어갈게요." 문을 두어번 두드리고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민희는 테라스에 기댄 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준은 괜찮아 보인다는 생각에 다시 방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민희가 뒤돌아 형준을 바라보았다. 민희가 큰 보폭으로 형준에게 다가와 형준이 나갈려고 열어두었던 문을 닫아버리고는 형준을 끌어안더니 형준의 어깨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촉촉한 목소리로 민희는 혼인 하기 싫다며 칭얼거렸다. 형준은 난감한 얼굴로 민희를 토닥여주며 "주인 어른 한 성격 하시는 거 잘 아시잖아요. 싫다고 한다고 안 할 수 없는 거 아시잖아요. "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민희는 형준을 더 끌어안고는 어깨를 웅크리며 "우리 무슨 사이야?" 어렵게 말을 꺼냈다. '사이라니... 도련님과 몸종의 관계지... 근데 그런 사이끼리 입맞춤을 하고...' 형준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아무 말이 없자 민희는 형준의 볼을 감싸고는 입을 맞췄다. 민희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져 형준은 민희의 손에 제 손을 포개고는 평소라면 부끄럽다며 눈을 감았겠지만 이번엔 눈을 똑바로 뜬 채 민희를 바라보았다. 민희가 입을 떼고는 "너는 나랑 입맞춰도 아무렇지 않아? 나는 늘 떨렸는데" 애원조로 말하자 형준은 민희가 착각하는 거라 생각했다. 자신과 너무 오래 봐서 익숙함의 감정을 설렘으로 아는 거라고. 민희의 말꼬리를 자르며 "도련님이 저와 너무 오래 봐서 그런 거에요." 형준이 차마 민희의 얼굴을 못 볼 거 같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아무 말이 없어 민희를 바라보니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민희는 체념어린 눈길로 형준을 바라보았다. 민희는 방문을 열어주고는 푹 쉬어라고 말하며 형준을 방 밖에 세워두고는 문을 닫았다. 이후 민희는 노골적으로 형준을 피해다녔다. 아침에 깨우러 가기 위해 방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돌리려는 순간 문이 열리더니 멀끔하게 가쿠란을 입고 있는 민희가 형준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형준이 올 거라곤 예상 못했는지 놀란 기색을 감추며 표정이 금새 달라지더니 형준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형준은 너무나도 다른 민희에 어버버거리다 일거리 줄어서 좋네 이 생각을 하며 저를 부르는 소리에 "네에!" 답하고는 민희와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둘의 사이는 모호해졌다. 형준은 원래 이랬어야 했다며 제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러는 사이 어영부영 시간은 흘러가며 민희의 혼인식이 다가왔다. 형준에게 이제 아가씨가 될 분은 참하고 단화했다. 민희 옆에 서서 단 둘이 있는 모습을 보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형준 뿐만 아니라 다른 하인들은 두 분 잘 어울린다, 선남선녀다 이런 말을 했다. 형준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민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 거 같아 애써 환하게 웃어보이고는 더는 그 모습을 보는게 견디기 힘들어 냅다 도망쳤다. 민희는 그런 형준을 따라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려다 자신을 붙잡으며 말을 걸어오는 예비 신부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 앳된 앳된 소녀의 얼굴을 보면서 억지웃음을 웃어 보였다. 형준은 기다랗게 한숨을 쉬고는 정처없이 제 발걸음이 가는데로 온 장소를 둘러 보았다. 어릴적 민희가 제 손목을 붙잡고 데리고 온 비밀장소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륵하고 내려앉은 형준은 눈물이 차올라 울지 않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오늘따라 더 파란 거 같았다. 형준은 한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 어쩌면 다시 못할,
" 좋아해, 강민희. "
민희는 금방이라도 비가 올 날씨에 집안에 보이지 않는 형준이 걱정돼 우산을 든 채 바깥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녔다. 형준이 갈 만한 곳은 다 찾아본 민희는 퍼뜩 장소가 떠올라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누가 있는건지 안에서 혼잣말 소리가 들렸다. "좋아해 강민희" 분명 형준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비가 쏴아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내렸다. 민희는 형준의 좋아한다는 말만 듣고 그 뒤를 듣지 못했다. 좋아해? 누구를? 민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형준은 바깥 상황을 확인하고는 문을 연 순간 앞에 서 있는 민희를 보고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뛰어다녀 땀에 젖은 민희의 모습을 보고 민희가 비에 젖은 거로 알고 감기 걸리겠다며 민희를 걱정했다. 그러고는 제가 한 말이 생각나 들었나 싶어 민희를 바라봤지만 못 들은 눈치여서 작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밖은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산을 편 민희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형준을 끌어당겨 제 품에 안기게 했다. 형준은 따스한 온기와 박하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짝 민희 품에서 벗어 나와 틈을 둔 채로 걸었다. 민희는 형준 모르게 우산을 형준 쪽으로 기울어 걸었다. 민희의 한 쪽 어깨가 빗물에 젖어 들어갔다.
어영부영 민희의 혼인 날짜가 다가왔다. 여전히 민희는 형준의 짝사랑 상대를 생각하느라 형준은 민희가 자신이 남몰래한 고백을 들었을까봐 걱정했으나 민희의 행동이 전과 다른 게 없어 안도했지만 어쩐지 시원섭섭해졌다. 형준은 제 아가씨가 될 분을 미리 모시게 되었다. 원래 본가에 남아있을 생각이었던 형준은 민희의 고집에 못 이겨 분가하는 민희를 따라 나서야했다. 형준은 민희의 제안에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희는 형준의 짝사랑 상대가 제 집안 하인들 중 하나라 생각해 질투심에 형준에게 자신을 따라오라는 제안을 한건데 형준은 큰 눈을 꿈벅꿈벅하다 애써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희는 그런 형준의 모습에 많이 좋아하는구나 싶어 더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민희의 혼인 날짜가 앞당겨졌다. 형준은 민희를 향한 제 마음을 차근차근 정리해 갔다. 형준은 양복을 입은 민희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준다고 마주했을 때 어색했고 괜시리 자신과 결혼하는 것마냥 떨렸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형준이 볼을 두어번 찹찹 소리 나게 때리자 민희는 깜짝 놀라며 손을 잡아왔다. 형준은 민희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고는 민희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형준의 행동에 민희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손을 뒤로 숨겼다. 형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기를 부르는 것 같다며 민희의 방에서 바삐 빠져나왔다. 민희는 달려가는 형준을 붙잡으려다 말았다. 형준은 민희의 혼인을 보지 못할 거 같아 혼인 막바지 준비한다고 바쁜 사람들을 뒤로 하고 뒷마당에 가 따로 준비해둔 부케를 손에 들었다. 보랏빛 꽃 부케였다. 형준은 뒷마당에서 혼인이 진행되는 걸 듣고 있었고 민희는 자신을 축하해주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형준을 찾았다. 혼인이 다 끝난 거 같아 형준은 부케를 들고 민희에게 다가갔다. 민희는 제게 부케를 들고 오는 형준을 알아보고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형준에게 뛰어갔다. 금세 서로의 앞에 섰다. 형준은 눈물이 울컥하고 터져나올 뻔한 걸 꾹꾹 눌러참고 민희에게 부케를 내밀었다.
" 도련님, 혼인 축하드려요. "
형준의 목소리가 젖어 있다는 걸 알아차린 민희는 형준에게 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금방이라도 툭 건들면 울 거 같은 형준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형준은 민희 뒤로 아가씨가 걸어오는 걸 확인하고는 민희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밀었다. "아가씨가 기다리세요. 저는 뒷정리 도와드려야 해서..." 형준은 그 자리에서 냅다 도망쳤다. 민희는 또 형준을 붙잡지 못했다. 민희 근처에 온 부인은 민희 손에 들린 부케를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 스카비오사 부케군요. 참으로 화려하게 아름답네요 "
" 아 부인... 왔군요 "
" 스카비오사는 외관은 빼어나지만 꽃말은 그렇지 않죠. 무슨 뜻인지 알고 계실 거 같은데 "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
그제야 민희는 형준의 짝사랑 상대를 알아차렸다. 민희는 부케를 끌어안고는 섦디 서럽게 울었다. 그렇지만 알았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