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은 늦게 밝았고 저녁은 빨리 어두워졌다. 공부는 늘 지겨웠고 공기는 차가웠으며, 강민희는 내 옆에 있었다. 그게 열여덟의 겨울이었음을
사랑은 익어간다
w.익명
“니가 뭐라도 되는 것 같이 굴지 말라고 제발. 강민희.”
“......”
진심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강민희가 자신보다 나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번에도 그래서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애를 전치 3주로 만들어놓으면 어떡해. 이건 네가 잘못한게 맞아. 하지만...
“형준아.”
“......”
“내가 뭐라도 되는 것 같아서 그랬을 것 같아?”
“......”
“응?”
“그럼 너는. 너는! 사람 때린게 잘못이 아니야?”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
강민희는 나를 좋아할 것이다. 98퍼센트의 확률이었다. 나도 강민희를 좋아 할지도 모른다. 이건 97.9 퍼센트. 걔는 밤마다 머리를 싸쥐고 어떻게 해야 할지 짝사랑 남주처럼 고뇌할지도 모른다. 요즈음의 우리는 서로를 마주치면 귀가 빨개지고, 아닌척 하지만 말이 꼬이고. 무의식 중에 상대방의 눈코입을 훑어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한다. 우리 참 바보같지? 강민희는 내가 자기 좋아하는지 모를 것 같애. 걘 워낙... 그렇잖아. 애꿎은 길고양이한테 고민상담을 해 봐도 답 없는 사랑이다. 내가 먼저 확 고백 해 버려? 그냥 있어?
학교에서의 강민희는 긴 팔다리로 복도를 휘젓고 다니고, 점심시간엔 밥을 후딱 먹어치우고 아직 식사중인 날 뚫어지게 쳐다본다. 아 뭐야. 체할 것 같아. 식사중 팻말이라도 갖다 붙여야겠네.ㅋㅋ. 이런 저런 농담을 하면서 밥을 다 먹고, 양치하면서 또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이런데 신경이 안 쓰이냐고.
“야. 왜 자꾸 쳐다보냐?”
“어이구. 우리 준이 언제 형아만큼 크냥.”
“시발... 두고봐. 내가 니보다 일 미터는 더 큰다.”
쳐다보는 이유를 알 것 같지만 물어보면 이렇게 또 말을 돌리는데. 그게 또 좀... 귀엽다. 아 몰라. 내가 언제부터 강민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강민희는 또 나를 언제 좋아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어도 강민희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계기는 이렇다. 올해 여름 방학 때, 여느 날과 다름 없이 강민희 집에 에어컨 쐬러 갔다. 우리집은 에어컨이 고장났기 때문이다. 그날은 되게 좀 짧은 반바지를 입었는데, 강민희는 티비를 보며 소파에 누워있는 내 다리를 아주 구멍 뚫리게 바라보더니, 방으로 부리나케 들어가 담요을 가져다주었다. 야 너 추워. 다리에 덮어. 아니 시발 더워 뒤지겠는데 뭔 담요. 그리고서는 심호흡을 하더니 갑자기 집에 가라고 하는 것이다.
“아니... 해도 지구. 어두워지잖아. 좀만 더 있으면 완전 깜깜해져.”
“뭔 개소리야. 아직 밝은데.”
밖은 정말 밝았다. 여름이어서 해가 늦게 지기도 하는데. 어이가 털렸다. 아니야 너희 어머니가 걱정하셔. 내가 데려다 줄테니까 빨리 가. 결국 강민희가 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왠지 좀 다정하고...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힐끔힐끔 쳐다보고 말은 한마디도 안 했다. 집 앞까지 왔는데 얼굴이 터지기 직전의 잘 익은 토마토처럼벌게져서는 잘 들어가. 한 마디만 하고 뒤 돌아서 갔다. 그때까진 설마 했는데 집에 올라가 베란다로 내려다보니 얘가 가지도 않고 집 앞에서 난리 부르스를 떨고 있었다. 막 오두 방정을 떨면서 어떡해 어떡해 하는 소리가 집 안까지 들렸다. 저 미친놈이... 하고 창문을 열어 뭐라 뭐라 하려고 했는데. 강민희의 앞섬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악. 이층이었던 우리 집에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잘... 보였다. 와 저거 뭔가 요즘 그렇다 싶었어. 그러니까 날 보고 선거야 지금? 와... 아니. 말도 안 돼. 거울을 봤더니 얼굴은 시뻘개진 내가 보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진짜 어떡하니.
하지만 강민희와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땐 내가 강민희를 좋아한다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강민희의 불룩한 앞섬을 보고서, 강민희가 날 좋아한다는 걸 짐작하고 나서. 생각보다 거부감이 들진 않았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저 난 강민희를 현재 가장 친한 친구. 학창 시절의 소울메이트 정도로 생각했지 친구 그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이 어색했다. 강민희가 정말 날 좋아한다면 지금까지 나와 잘 맞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어쩌면 나에게 맞췄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훗날 내가 강민희와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되고, 언젠간 깨지게 된다면 그땐 어떡하지? 이런 생각도 했었는데.
나는 강민희를 좋아할까? 앞서 말했던 일명 ‘여름방학 사건’. 그땐 솔직히 내가 잘 몰랐을 것이다. 불확실 했으니까. 그래도 좆을 세웠다는 것. 그것으로 난 강민희가 날 좋아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하지만 난? 강민희가 날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내가 좋아하지 않는데 강민희가 고백하면. 까야되나. 아니면 친구 관계를 위해서 억지로 사귀거나. 그냥 나도 너 좋아했어. 하고 개구라를 칠까?
그 사건 이후 어느날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 그냥 아무생각 말자. 하고 옆에서 책상에 엎드려 볼살이 찌부된 채 자고있는 강민희를 관찰했다.
“곤히도 잔다.”
어휴. 넌 타들어가는 내 속도 모르고. 잘 자네. 나도 강민희와 같은 자세로 마주보고 누웠다. 그리고는 강민희 얼굴을 하나 하나 뜯어 관찰했다. 속눈썹 진짜 기네. 눈썹이 원래 진하긴 했지. 코 말랑말랑 할 것 같다. 입술은... 얘랑 키스하면 어떨까. 헉.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거지. 나 설마 강민희 좋아하나? 아니 이렇게 쉽게.
밤에도 점심 때 봤던 강민희 입술 생각이 났다. 반들반들하고 붉은 꽃 같았었다. 이런 미친. 그만하자 제발.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덮고 애국가를 불러봐도 강민희 얼굴 그리고 입술이 생각났다. 그리고 얼굴이 불타는 것 같았다. 거울을 확인 해 보니 역시나 잘 익은 토마토가 되어있었다. 나 강민희 좋아하나봐. 근데 진짜 한 순간에 이럴 수 있어?
*
그리고는 겨울이 왔다. 강민희는 여전히 티를 냈고 나는 어떻게 보일 지 잘 모르겠다. 좀 규모가 작은 우리 학교는 교실도 작았고 교장실에만 히터가 빵빵하고 복도와 교실을 무슨 히말라야에 온 것 같았다. 그래서 앞자리 애 한테 빌린 담요를 덮고 양 쪽 주머니엔 핫팩을 넣어두고 추위를 이겨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점심 시간 끝나가는데 얜 왜 안 와. 화장실 갔다 오겠다던 강민희는 어딜 갔는지 5교시 종이 칠 때까지 오지 않았다. 텅 빈 옆자리를 바라만 보고 있을 때 부반장이 교실문을 열며 소리쳤다.
“야 강민희가 삼 반 양종학이랑 붙었대!”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친 새끼가. 진짜 돌아버리겠네. 삼 반 양종학 우리 학교에 몇 없는 일진 중 한번 때리면 끝장 날 때 까지 때리기로 소문이 자자한 애였다. 분명 강민희는 어제까지만 해도 나랑 같이 엽떡 먹으면서 너 누구랑 싸워본 적 있냐? 했을 때 아닝. 하고 싸워 본 적 없다 했던 앤데. 양종학이 애를 아주 전치 6주 만들어 둔 거 아니야. 반 애들이 우루루 몰려가는 곳으로 따라갔다. 멀리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 그리고 주먹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봐도 한 명이 개 발리고 있었다. 헐 강민희 어떡해. 어쩌다 싸움이 붙어서. 제발 아무 이상 없길...
“강민...희?”
싸움 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겠지만 나는 강민희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더 크게 다시 말할 순 없었다. 저게 뭐야...? 양종학이 개 발리고 있었다. 강민희가 양종학 위에 올라 타 양종학의 얼굴을 사정없이 갈구고 있었다. 양종학의 얼굴은 아주 피 떡이 되어있었고 한 쪽 다리를 움켜잡은 채 아무 저항도 못 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강민희는 얼굴에 작은 생채기 몇 개와 손에 쓸린 상처가 있는 것이 다였다.
“악... 그만. 제발 그만. 미안해.”
“내가 하는 말 똑똑히 들어. 다시 그딴 말 하면 가만 안 둬.”
그리고 어떻게 됐던가. 누군가 선생님을 불러와 둘은 어딘가로 불려갔다. 그리곤 자주 보던 민희의 어머님과 양종학의 부모가 왔고 결과적으로, 강민희는 정학을 먹었다. 전치 3주. 진짜 저 미친 새끼가. 정말 정이 뚝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럴 애가 아닌데... 하면서도 어딘가 괘씸하고 정말 쓰레기 같아서 강민희가 정학을 먹은 동안 왜 그랬는지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진짜 미친 새끼 인가봐... 왜 그랬는지도 물어보고 싶은데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강민희의 정학 기간이 끝나고 나서도 얼굴도 보지 않았다. 반 애들도 그 현장을 목격하고 나서는 강민희 주위에 잘가지 않았고 강민희가 알고보니 개양아치설이 돌았다. 강민희는 종종 날 힐끔대긴 했으나 대부분 교과서에 얼굴을 처박고 지냈다. 그렇게 열여덟은 끝나가고 있었다.
*
와. 역대급 추위네. 정말 정말 추운 12월의 끝자락이었다. 강민희 양종학 폭행사건. 어쨌든 아이들은 금방 흥미를 잃는다. 그래도 얻은 중요한 정보가 있었다. 강민희가 양정학을 팬 이유. 2학년 정보통인 애한테 들었다.
아니 내가 그 현장에 있었거든? 원래 양정학이 좀 양아치기는 했잖아. 그래서 빨리 지나가려고 했는데, 아 이 얘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진짜 형준아 나 한테 뭐라 하지 마. 글쎄 화장실 입구에서 양정학이 지 친구랑 여러 애들 뒷담을 까다 니 얘기가 나온거야. 막 니가 존나 여우같다고. 니 말하는 거 보면 아양 떠는 것 같다고 토 나온다고 그러면서 너에 대한 말들을 딱 하는데 그걸 민희가 듣고...
스탑. 알았어. 고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강민희가 그래서 그랬구나... 나 때문에 그랬구나. 결국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거네. 싶었다. 강민희는 미성숙했다. 그래도 좀 참지. 어차피 강민희랑 난 내년에 다른 반 되면 만나지도 않을 사이가 됐는데 뭐가 중요하지. 가볍게 생각하자... 가볍게. 그랬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진짜 개 싫어 강민희. 나 때문에... 흐... 양아치 됐어... ”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한 번을 말을 안 해주냐고! 나쁜놈 진짜 이기적이고 자기만 생각하지 아주... 진짜 주책맞게 길 한복판에서 꺼이꺼이 울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다음 날, 설정같은 엄마의 심부름으로 길을 나섰다. 퉁퉁 부은 눈. 보통 이러면 꼭 강민희같은 애랑 마주치더라. 마주치면 욕 한바가지 퍼부어야지. 강민희 생각을 하다 전봇대가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가다 부딪혔다. 아! 진짜 되는 게 없다. 강민희 때문이다.
“시발. 빌어먹을 강민희.”
“나?”
“아악!”
이런 미친. 미친! 그래 이럴 줄 알았어. 강민희가 이마를 문지르고 있는 내 앞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
“내가 왜 빌어먹을 강민희야?”
대답 할 새도 없이 눈에 띈 상처들이 거슬렸다. 그 잘난 얼굴에 군데 군데 새로 생긴 상처들이 가득했다. 양종학이랑 싸워서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너. 요새 싸우고 다니냐?”
“......”
“맞네. 너 요즘 이상해. 그래서 내가 너랑 안 노는 거야. 도대체
뭔 짓거릴 하고 다녀? 진짜 미친새끼네.”
“형준아. 할 말이 있는데.”
“니가 뭐라도 되는 것 같이 굴지 말라고 제발. 강민희.”
“......”
진심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강민희가 자신보다 나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번에도 그래서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애를 전치 3주로 만들어놓으면 어떡해. 이건 네가 잘못한게 맞아. 하지만...
“형준아.”
“......”
“내가 뭐라도 되는 것 같아서 그랬을 것 같아?”
“......”
“응?”
“그럼 너는. 너는! 사람 때린게 잘못이 아니야?”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한참 뒤에 정적을 깬 건 강민희였다.
“너 내가 왜 양종학 때렸는지 알잖아.”
“그래 알아. 나 때문이라며?”
“그럼 내가 너 좋아하는 건 알겠네.”
“......”
“형준아. 나 너 좋아해.”
“... 알아.”
“......”
“근데 좀 더 지켜 봐야겠어, 너.”
난 널 좋아하는 지 확신이 안가. 너 요즘 이상해져서 정이 뚝 떨어졌어. 하지만 심장이 뛰고 있는 걸 봐서는, 좀 더 기다려 보자.
“나중에 다시 고백해. 민희야. 아직은 확신이 안 가.”
“형준아...”
“근데. 네가 확신이 들게 해 줄 수 있을 거야.”
“......”
“기다릴게.”
사랑은 익어간다. 우리는 아직 열여덟이니까. 미성숙하기에, 우리가 열여덟인 것. 강민희와 난 덜 자랐기에,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열여덟의 끝 자락 이었다.
사랑은 익어간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