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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마주치고


미소를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도망

강민희는 눈을 떴다. 늦은 아침이었고 다행히도 오늘은 주말이었다. 어제 내가 뭘 했더라.


“아, 축제.”


예쁜 아이를 봤다. 완전 내 이상형이었는데. 번호 달라고 해 볼걸.

어제 갔던 축제에서 강민희는 사랑에 빠졌다. 고등학교 축제는 처음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엄청 꾸미고 갔는데, 생각보다 할 것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지루해하던 참이었다. 축제의
꽃이라는 공연 시간이 다가와 기대하며 친구들과 공연을 보러 갔지만 공연도 초반에만
신났지 갈수록 지루해져 갔다. 아, 진짜 재미없네. 괜히 왔다. 주변에 재미있는 것 좀 없나
살피려고 고개를 돌린 그때였다.


눈이 마주치자 강민희는 웃었고 그 애가 저를 따라 웃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그 애의 웃는 모습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고 그 얼굴이 거의 희미해졌을 때쯤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얘는 내 중학교 친구 송형준.”
“안녕.”
“안녕, 나는 강민희. 친하게 지내자 우리.”


같은 학교로 배정된 거 보니까 운명이네. 운명이야. 평소 운명론 따위는 잘 믿지 않았지만
오늘부터 믿기로 했다. 강민희는 지금 엄청나게 신이 났으니까. 이건 둘이 이어지라는 신의
계시야.

-

많이 친해지고 싶었던 마음과는 다르게 계절이 바뀔 동안 형준과 제대로 된 대화 한번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전부 송형준한테 있었는데, 형준은 저가 말을 걸면 어떻게든 피해 버리기
일쑤였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아니면 그냥 나를 싫어하나? 나를 피하냐고 대놓고
물어보기에는 태도가 너무 애매했고 그렇다고 형준이 저를 다른 애들과 똑같이 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강민희는 어떻게 하면 형준과 친해질 수 있을지 매일 밤 고민했다. 친구한테
상담까지 했다.
하지만 말을 걸 때마다 형준의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는 사실을 강민희는 절대
알지 못했다.


송형준은 낯을 조금 가렸다. 아니, 사실 많이. 어렸을 때부터 쭉 그래왔고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아 그냥 이렇게 불편함 없이 살았는데, 이게 저와 강민희의 사이를 막을 줄이야.


“형준아, 혹시 내가 뭐 잘못했어?”
“엉...?”
“아니면... 나 싫어해...?”


할 말이 있다며 점심시간에 강민희가 저를 불러냈다. 단 둘이서 얘기하는 건 거의 처음이라
설렘 반 긴장 반인 마음으로 갔는데 가자마자 듣는 말이... 근데 쟤 지금 울먹이는 거야? 아니,
왜 울려고 해. 지금 울고 싶은 건 난데....


“안 싫어해....”
“아니면 다행인ㄷ... 형준아 울어??”
“나 너 안 싫어해....”
“...”
“내가 낯을 많이 가려서어... 그래서 그래... 미안해 민희야....”


강민희가 송형준을 울렸다. 강민희는 당황했다. 그리고 송형준은 더 당황했다. 뭐야, 나 왜
울어?


“아니야, 나 괜찮아 형준아. 울지 마. 뚝!”
“미안해... 울어서 미안해....”
“진짜 괜찮아. 점심시간 끝나겠다. 그만 울고 우리 교실 들어가자. 응?”


앞에서 형준이 너무 서럽게 울자 괜히 저가 잘못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이러려고 부른 게
아닌데.... 근데 형준이는 왜 우는 것까지 귀여울까.

형준이 펑펑 운 그날 이후로 강민희는 송형준에게 더욱 친한 척을 해 왔고 형준도 점차 민희를
피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계절이 바뀌었을 때쯤 둘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는 물음에 서로의 이름을 댈 만큼 친해져 있었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친구. 애초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다가가면 안 됐던 것일까. 친구이기에 둘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었고 그
선을 넘는 순간 형준과 사랑은커녕 우정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기에 강민희는 아무리
답답해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

 


강민희가 학년이 바뀔 때까지 애인을 만들지 않자 친구들이 왜 여친을 안 사귀냐고 물어 왔다.
형준의 몸이 잠시 굳었다.


“어... 그냥 별로 관심이 없어서? 걔네도 나한테 관심 없는데 뭐.”


순 거짓말이었다. 강민희는 고백받은 것을 나름대로 열심히 숨겼지만 형준이 아는 것만 해도
여섯 번이 넘었다. 아마 지금까지 열 번은 거뜬히 넘을 것이다. 그런 강민희한테 관심이
없다고? 진짜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송형준은 속에서 열불이 났다. 물론 강민희는 이런
형준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으며 이대로면 얼마 못 가 마음을 참지 못해 고백해서
어색해지거나 아는 척도 안 하는 사이가 될 것이라고 판단을 하였기에 강민희는 결심했다.
여자친구를 사귀기로. 그리고 불과 결심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강민희는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누군가를 꼬셔 본 적도, 송형준 이외의 다른 사람과 사귄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막막해하던 찰나, 같은 반 여자애가 오랫동안 저를 좋아해
왔다며 고백을 했다.

“나 여친 생김.”
“... 뭐??”


송형준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말을 몸소 체험했다. 물론 실제로 무너지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놀라. 부럽냐?”
“아니... 내가 살다 살다 강민희가 연애하는 것도 보는구나....”


물론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저 얼굴에 어떻게 3년 내내 여친이 안 생기겠어. 나중에
다가올 충격이 무서워 혼자 이미지 트레이닝도 여러 번 해 보아 이제 직접 들어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단련됐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송형준은 다시
강민희를 피하기 시작했다. 가장 친한 친구인 것에 만족하기로 했지만 민희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이상 둘이 붙어있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볼 자신이 없었으며 송형준은 그렇게까지
마음고생을 하며 강민희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둘은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이를 참지 못해 먼저 말을 꺼낸 건 강민희였다. 당연했다. 강민희는 사이가
틀어지기 싫어 여자친구를 사귄 것인데 그 결과가 멀어지는 것이라니.


“야, 너 요즘 왜 그래?”
“뭔 소리야”
“나 피하고 있잖아. 내가 뭐 잘못했어?”


하마터면 너를 좋아한 내가 잘못이라고 말할 뻔했다. 너 잘못한 거 없어. 그럼 너 나 왜
피하는데. 피한 적도 없어. 대놓고 피했으면서 뭘 안 피했대. 진짜 어이없네.


“야, 그러면 내가 계속 너랑 붙어있냐?”
“지금까지 계속 붙어있었잖아.”

“그때랑 지금이랑 같아? 너 여친 있잖아. 여친이랑 붙어있는데 나보고 그 사이에 끼라고?
미쳤냐? 개싫어 진짜….”


아니 형준아. 너 울어? 응 나 또 우나 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지내는데. 강민희 진짜 개새끼. 희망고문 제대로 하네. 앞으로 내가 저 새끼를 더
좋아하면 개다 개.

-


멍멍! 멍!


송형준은 개다. 하지만 조금 억울했다. 저는 그만 좋아하기 위해 강민희를 진짜 열심히 피해
다녔다. 그런데 강민희가 어느 날 갑자기 와서 따지더니 그 다음 날 여자친구와 헤어져서
왔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 하냐.”
“네 생각.”
“애기야 나 방금 좀 설렜다.”
“응….”


그래, 화해한 거 좋다. 좋은데, 너무 어색해서 죽고 싶었다. 아무리 가장 친했다지만 같이 안
다닌 시간이 한 달을 조금 넘을까 말까 하는데 단둘이서 하교라니. 그 한 달동안에는 강민희가
여자친구를 만났었고… 송형준의 눈물이 있었다. 오늘은 그 눈물 이후로 처음 보는 날이었다.
어색해서 죽고 싶다는 말 취소. 쪽팔려서 죽고 싶다. 물론 강민희도 어색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 어색함을 참지 못한 강민희가 아무 말이나 뱉고 나면 쪽팔림으로 죽고 싶은
송형준이 대충 아무 대답이나 했다. 그리고 정적. 그러면 또 강민희는 머리를 굴려 아무
말이나 했고 송형준도 열심히 아무 대답이나 했다. 그래서 그날 했던 대화 내용은 둘 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딱 하나 빼고.


“형준아. 우리 여름방학에 애들이랑 1박 2일로 놀러 갈래?”
“1박 2일?”
“응, 바다 근처로 가자.”


그래. 재미있겠다. 아직 장소도, 인원도 정하지 않았고 몇 달은 더 남았지만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었다. 강민희는 그때쯤이면 형준이랑 사이가 다시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품으며 여름방학만을 기다렸다.


강민희의 바람대로 여름방학이 가까워질수록 둘의 사이도 점점 회복되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발전했지. 그리고 더 이상의 작은 욕심도 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욕심냈다가 더 멀어져 버리면 안 되니까.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지금 이
상태만 유지하자고.

-

“와, 바다 대박.”
“너 바다 좋아하냐?”
“어, 완전.”


예쁘다, 그치. 형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민희였다. 꼭 자기 같은 것만 좋아하네.


여행의 꽃은 술이라며 여행 전부터 노래를 부르던 친구들의 손에 어떻게 가져왔는지 모를
초록 병 여러 개가 들려 있었다. 이걸 다 마시자고? 왜, 쫄리냐? 누가 그래? 야, 깔아.


갑자기 자존심에 불이 붙은 두 친구 때문에 얼떨결에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원래 고기를
먹으면서 조금씩 마실 계획이었지만 술판이 벌어지자 모두 계획을 깨고 정신 없이 마시기
시작했다. 결국 저녁 10시가 되기도 전에 친구들은 전부 뻗어 버렸고 그런 친구들 덕에 혼자
죽어나는 건 주량도 센 주제에 얼마 마시지 않은 강민희였다. 혹시 술에 취해 다 고백해
버릴까 봐 많이 안 마신 건데.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으면 그냥 막 마실 걸 그랬다.

바다에 비친 달빛이 반짝여 아름답다. 형준은 조금만 더 마시면 마지막 남은 이성까지 끊길 것
같아 서둘러 바다로 나왔다. 무슨 말을 뱉을지 본인도 몰랐기 때문에 두려웠다.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제 마음이 썩어가더라도 강민희를 보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 강민희가.


“너 여기서 뭐해. 한참 찾았잖아.”


강민희다.


“추워. 얼른 들어가자.”
“좋아해.”


저의 입술에 말캉한 무언가가 닿았다 떨어졌다.

-


눈을 떠보니 침대 위였다. 내가 미쳤지. 그렇게 생각없이 마셔서 필름까지 끊기고…. 그래도
방 안에 있는 걸 보니 큰 실수는 없었나 보다. 라면 냄새 난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
밖으로 나오니 강민희가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어, 일어났냐?”
“응… 나 어제 뭐 이상한 말 안 했지?”
“안 했으니까 빨리 애들 좀 깨워 봐. 해장 해야지.”

강민희는 기분이 좋았다. 쌍방이었다. 지금까지 해 온 마음앓이가 헛수고가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송형준을 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강민희를 웃게 만들었다. 형준은 어제 일이

기억나지 않는 듯했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저가 마음을 알았으니 이제 다가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형준과 이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바뀐 게 없었다. 아니, 바뀌었다. 송형준을 대하는 강민희의 태도가. 강민희는 열심히 티를
냈다. 주위에서 송형준을 좋아하냐고 물어 올 만큼 플러팅을 쳐 댔다. 하지만 송형준은 열심히
부정했다. 우정일 뿐이며 다 오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둘 사이는 바뀐 것이 없었다.
어찌보면 당연했다. 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지만 강민희만 기억하는 일. 그 일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이 정도면 그때 좋아한다는 말이 나한테 했던 게 아닌 거 아닐까. 계속 저를
밀어내는 송형준이 미웠다. 하지만 송형준도 강민희가 미운 건 마찬가지였다. 계속 여지를
주는 강민희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매일 하는 말에 매일 설레이는 자신이, 그만했으면
좋겠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해 주기를 바라는 자신이 싫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얼마 후 년도가 바뀌고 학년이 올라가 공부에만 매진하여 서로 만나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었다. 형준은 조금 아쉬웠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그랬다면
정말 오해해버렸을 것 같아서.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1년이 지나고 있었다.

-


졸업식이라 그런지 우는 애들이 많이 보였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좀 울 것 같기도
하고. 송형준과 연락은 끊긴 지 오래였다. 이렇게 끝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적어도
친구로는 남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괜히 혼자 오해해서 부담스럽게 만들고…. 이제 다시 못 볼
거라는 생각이 들자 안개가 낀 듯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야, 강민희 울어?”
“어…?”


송형준이었다. 왜 울고 그러냐, 같이 사진이나 찍자. 마지막이잖아. 마지막. 그래,
마지막이니까.


“형준아, 나 이따가 할 말 있는데.”
“…”
“저녁에 전화하면 꼭 받아야 돼.”
“…”
“알겠지?”
“응, 알겠어.”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고백은 해 보고 끝내야지.

-

송형준 집이 여기였던가. 너무 오랜만에 와서 조금 헷갈리네. 휴대폰을 들어 전화 앱을
눌렀다. 아직 즐겨찾기가 되어 있는 송형준의 이름이 저를 반기는 듯했다. 전화 받으면 집
앞으로 나오라고 해야지. 아, 또 부담스러워 하려나. 거절하면 어쩌지. 아니야,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통화 버튼을 누르자 음성이 들려 왔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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