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희가 현관문이 닫히기도 전에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더니 굉음과 함께 집바닥을 굴렀다. 하찮은 도어락 음악이 잠긴 문을 확인해 주면 민희는 일기, 일기장 어디 갔어. 숨도 못 고른 채로 바로 몸을 일으켜 중얼거렸다. 손때 가득한 일기장을 책상 위에 펼치고 의자를 당겨 앉는다. 급박하게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민희의 불안감을 대신했다. 연필꽂이에서 뽑힌 아무 펜이 일기장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엑스 다이어리
202x년 12월 3일
형준이를 봤다. 요즘 꿈에 자주 나오더니, 암시였나. 오늘 본 형준이는 웃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는 얼굴로 손 내미는 형준이를 잡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는 일은 꿈만으로 충분했으니까. 형준이는 눈 접어 웃을 때 제일 예쁘기도 하고. 그렇게 웃으면 둘이 닮았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었는데. 그때마다 형준이는 무슨 소리냐면서 툴툴거렸지. 발갛게 물들던 귀는 형준이 본인도 아닌 나만 알아챘을 거다. 좋기만 하다고, 사랑하면 닮는 거라고 한 마디씩 거들걸. 웃기만 했던 내가 원망스럽지만 이제와 새삼.
어쨌건 형준이를 발견하자마자 놀란 마음에 문도 열다 말고 뛰쳐나왔다. 그와중에 전화받는 척했던 내가 우스웠다. 형준이는 나인 걸 알았으려나. 3년을 만난 사이였으니까 분명 알았겠지. 내가 숨길 수 있는 덩치도 아니고. 반응은 어땠을까? 오늘 하루 재수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는데, 난. 형준이가 아직 이사가지 않았다면 여전히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는 건데, 어떻게 헤어지고 1년 동안 코빼기도 안 보였다가 오늘처럼 나 후줄근할 때 만나게 된 건지. 운명이 가혹했다.
운명 하니까 우리가 만나던 때가 생각난다. 형준이는 운명을 믿었고 우릴 운명이라 여겼는데. 난 운명을 믿지 않았었지만 사람 사이의 인력은 운명이 필연적으로 작용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형준아, 니가 맞았어. 내가 틀린 거야. 운명이어야 했던 우리를 알 것 같아. 그 긴 시간을 혼자 견딜 때 형준이는 이런 마음이었을까.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그래서 더 미안한 마음뿐이지만 좀 보고 싶다, 형준이가.
12월 11일
3일 이후로 매일 그 카페를 들렀지만 형준이는 볼 수 없었다. 여덟 번은 더 갔는데도. 지난 주에 운명이라 떠든 게 무색해지게. 정말로 재수없다 생각해서 안 오는 거라면.... 그래도 할 말 없지만 보고 싶은 욕심이 크다. 형준이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고 말할 때에 나에게 기회를 주려던 그 심정을, 말 뜻을 이해했었다면.
친구 통해서 새 남자 친구 만난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연상이랬나. 연상이라는 사실을 잊었을 리가 없지만 괜히 알은 체하기 싫었다. 내 속이 너무 좁아서. 형준이는 연상이랑 잘 어울리긴 하지. 다정한 사람이 좋다고 했었으니까. 형준이가 처음 나한테 고백할 때도 다정한 민희가 좋다며 얼굴 붉히던 게 생생하다. 멋쩍게 뒷목까지 매만지던 작은 손도. 모두에게 다정할 줄만 알았지, 형준이에게 조금만 더 특별하게 다정했더라면.
그때는 자존심이 뭐라고 형준이에게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까. 감정은 말하지 않으면 절대 남이 알 수 없다. 형준이가 날 남겨 둔 뒤로 배운 게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중 하나였다. 지금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주저없이 모든 감정을 꺼내 보일 수 있을까? 할 수 있을 것 같다, 염치없게. 이렇게 염치없이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12월 12일
어제 일기를 다시 읽었더니 계속 과거에 발목을 붙잡힌다. 형준이는 툴툴거리면서도 매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해 줬었는데. 그렇게 낯간지러운 걸 싫어하던 형준이를 잘 알면서도 나는. 왜 그걸 당연하다 여겼을까.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형준이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한 거고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지. 일어나면 내 목소리로 눈뜨는 하루가 즐겁다고, 잠들기 전까지 나랑 함께일 수 있는 하루가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형준이었다. 나는... 나도, 라고만 말할 줄 아는 바보였고. 진부하더라도 너랑 있으면 행복하다고 덧붙여 볼걸.
12월 15일
그런데 형준아, 내 눈을 보고 있으면 제일 사랑받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그랬잖아.
12월 17일
돗대를 마저 피우고 편의점을 다녀왔다. 한 갑이랑 간단한 끼니, 종량제 그런 것들을 품에 안고서. 형준이는 담배 냄새를 싫어했다. 그런 형준이랑 헤어지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우습게도 담배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스물하나에 시작한 담배는 이제 한 개라도 피우지 않으면 하루가 허전했다. 형준이의 부재를 애써 연기로 채우려는 것 같기도 했다. 형준이가 돌아올 리는 없지만 정말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다시 내 손을 잡아 준다면 안주머니에 있는 갑도 라이터도 다 버릴 수 있을 텐데.
형준이는 내가 자주 술자리에 얼굴을 들이미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런 빈도수로 내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했고 형준이는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의미없는 행동들임에도 그게 맞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형준이는 내가 술자리에 갔던 밤이면 잠을 설쳤다고 했다.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잘못을 알았기에 이유까지 듣는다면 형준이한테 영영 미안해할까 봐.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지금도 형준이에게 용서를 구하려는 건 매한가진데. 물어봐야만 했다. 형준이는 왜 잠을 설쳤을까. 늘 저지르고 나서 하는 후회보다 망설였던 결과에 대해 후회가 컸다. 지금도 그렇고.
12월 20일
곧 형준이가 내 앞에서 처음으로 울었던 날이 돌아온다. 한창 형준이한테 이것저것 사 주고 싶어서 형준이 몰래 단기 알바까지 했었던 이맘때. 형준이랑 잘 어울릴 귀여운 카디건, 한 번쯤은 입고 싶다던 커플 후드티, 형준이가 평소에 탐내던 신발, 제대로 맞추고 싶었던 커플링. 선물 받고 기뻐할 형준이 반응을 기대하며 내가 더 설렜었다.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는데.
12월 21일
크리스마스가 너무 싫다. 항상 형준이 생일쯤이면 모두들 이미 크리스마스라며 트리를 매장 안팎으로 전시하고 어딜 가도 캐롤, 크리스마스 전구, 붉고 파릇한 색깔들. 무엇보다 설렘으로 들뜬 얼굴들. 너무 싫다. 트리를 보며
진짜 크리스마스인가 봐, 민희야. 우리 크리스마스 때 뭐 할까?
들뜬 형준이 얼굴이.
꼬마 전구가 가랜드처럼 걸린 벽돌에 날 세워 사진 찍어 주겠다더니
어, 방금 민희 잘생겼어, 옆태.
형준이 말이. 빨갛거나 초록으로 물든 세상에 가장 반짝이던 형준이가. 아직도 형준이의 작은 습관 하나, 프레임 하나 그대로 기억하는 내가 제일 싫었다.
12월 22일
나는 아무한테나 키가 큰 사람이었지만 아무의 말이나 듣기 위해 허리를 굽히지는 않았다. 못 들어서 되물은 적은 있어도. 내 웃는 얼굴이 예쁘다는 말에 형준이 앞에서는 더 자주 웃었다. 일부러는 아니었고 형준이랑 있으면 저절로 웃음이 났으니까. 조금 더 형준이의 말을 의식했을 뿐이다. 마냥 좋아서 광대가 아픈지도 모르고 계속. 가벼운 스킨십은 어느 누구랑도 거리낌 없었지만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거나 귀를 만지는 건. 그런 건 전부 형준이한테만. 마지막까지 하지 못한 말들이라 아쉽기만 하다. 우는 그날의 형준이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사람처럼 보여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도 이제 일주일 남았네.
12월 23일
지금 이 일기도 우리가 자주 앉았던 구석진 자리에서, 같이 시켜 먹던 수박 주스와 함께 쓰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기하다. 그래도 한 동안은 생각도 나지 않던 사람이 대뜸 꿈에 나오기 시작하더니 우연처럼 마주치고. 또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지만 말이라도 걸어 볼 걸 그랬다. 그럴 면목이 없지만 내가 잘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얼마 안 가 내 감정을 전부 읽어낼 형준인 걸 알지만. 후회의 크기만큼 꼬리표가 길어지는 게 안쓰럽다. 무엇보다 안쓰러운 우리 형준이. 아니, 지금은 우리라는 말도 섣불리 붙일 수 없는 사이지만. 자꾸만 연상의 품에 안겨 얼굴을 부비적거릴 형준이가 아른거린다. 아닌 척 종종 어리광피우던 동글동글한 눈코입이 그렇게 애틋했는데. 위에서 볼을 감싸고 주물거리면 매섭게 찢어진 체해도 만들어도 모난 구석 하나 없던 눈이, 장난 삼아 코를 살짝 물면 빨개진 코를 감싸고 오늘은 따로 자자며 닫히는 문 틈새로 보이던 뒷모습이, 속상한 일에 입이 삐죽 마중 나왔어도 사랑스럽기만 했던 올라간 입꼬리가 모두 눈을 뜨면 주먹 안의 모래처럼 흩어진다. 정말로 묻고 싶은 말이 하나 생각났다.
형준아, 너도 내 생각이 난 적 있었어?
12월 24일
12월에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형준이 꿈을 꾼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불길하게 난 아침 일찍부터 선물을 양손에 잔뜩 들고 형준이 집을 향한다. 몸이 곳곳이 불편하고 뻐근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현관문을 두들긴다. 형준이가 작게 하품을 하며 나온다. 나를 확인하더니 큰 눈을 쏟을 것처럼 크게 뜨고서는 얼어붙는다. 이게 다 뭐냐면서 한 번 꿈뻑이면 내 오른손이, 다시 한 번 꿈뻑이면 내 왼손이 그 눈에 담겼다. 그럼 나는 자랑스럽게 형준이한테 내밀고. 형준이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큰소리를 낸다. 그러느라 연락도 안 받았냐고. 뒤늦게 홀드키를 누르면 23통의 부재중, 14개의 문자. 발신자는 모두 송형준으로 하나. 오물거리던 작은 입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들어오라는 말을 뱉을 때,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 이상은 꿈이 필요 없었다. 우는 형준이, 돌아서는 나. 이미 꿈보다 더 생생한 기억과 감각이라 굳이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벌써 몇 년째였다.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말자. 길 한복판에서 울고 싶은 기분을 느낄 것 같았다.
12월 25일
어제는 잠만 잤다. 가끔 티비 보고, 밥 한 끼 먹었던 시간 빼고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늦은 오후에야 정신을 차렸을 때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다 본 풍경은 눈이 쌓여 하얀 세상이었다. 소복소복 쌓인 게 꼭 추억 같아서 억울했다. 엊그제 서울은 비가 내리더니 왜 오늘 눈이 오고 난리래. 괜히 탓하고 싶었다. 그렇게 바랐던 화이트 크리스마스. 티비에서는 6년만이랬다. 우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면 눈사람을 크게 만들자고 약속했던가. 이상하게 그것만은 기억나지 않았다. 형준이는 눈을 좋아했으니까 분명 오늘을 기쁘게 보내고 있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형준이에게 기분 좋은 하루일 수 있도록 축복을 빌어 주는 것뿐이었다. 무력감. 다시 잠들고 싶었다. 내일은 눈이 그치면 산책이라도 해야겠다.
민희가 비척거리며 옷장을 당겨 열었다. 추울 테니까 목도리도 챙기자. 멀끔하게 갈아입은 제 자신을 전신 거울에 비춰 보던 민희는 동네 한 바퀴 도는데 뭘 그렇게 신경 쓰나 싶다가도 오늘은 느낌이, 느낌이 그랬다. 손으로 갈라진 머리를 빗은 다음에야 문을 여는 민희였다. 엘리베이터는 유독 더딘 속도로 민희를 1층에 내려 주었다. 습관적으로 시선이 우체통에 닿는다. 오늘은 빨간 날인데. 고지서가 날라올 날도 아니었다. 삐뚤게 꽂혀 있는 크라프트 재질의 봉투. 로비를 나서려던 민희는 급하게 몸을 돌려 다시 엘리베이터를 불렀다. 어쩌면.
이번 달 초에 널 본 적이 있어.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에서. 널 닮은 사람이라기에는 내가 널 너무 잘 알고 있더라. 너는 급한 일이 있었는지 들어오다 누군가와 전화하면서 밖을 나갔어. 인사라도 할 생각으로 의자에서 엉덩이 들던 내가 뻘쭘했었지. 그렇게 멀어졌어. 우리 마지막 그때처럼. 그리고 여전히 넌 바쁜 사람 같았어. 그냥 지나가면 됐을 텐데 굳이 편지를 쓴 이유에 대해 변명 좀 하고 싶어. 긴 시간 동안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많이 달라졌거든.
며칠 전부터 니가 꿈에 나왔어. 처음 나온 건 아니었지. 헤어지고 한동안 꿈에 나온 넌 힘들어하는 모습이었어. 그래도 난 모른 척했지. 내가 헤어지자 했고 정말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차차 시간 지나면서 깨달은 게 있었어. 있는 그대로의 날 사랑해 주던 너와 달리 나는 조건이 붙인 강민희를 좋아했다는걸. 처음엔 다정한 강민희. 연애하는 동안에도 이런 거, 저런 거 내가 바라는 대로 해 주는 강민희. 마지막까지 항상 내 옆에 있어 줘야 하는 강민희를 바랐던 거야, 난. 한 달 가까이 지났나. 네가 준 사랑이나 내 실수를 곱씹으면서 울다 잠든 밤에 꿈은 더 이상 꾸지 않았어. 그 이후로도 더는 반복되지 않았지. 민희야, 그거 알아? 꿈에 어떤 사람이 나오면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싶어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날 보고 싶어하기 때문에 간절해서 내 꿈에 놀러오는 거래. 그래서 너무 서운했어. 당장이라도 찾아가 이제 내가 보고 싶지 않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내가 무슨 자격으로. 너를 우연히 만난 뒤로 꿈에 나온 넌 여전히 다정해서 꿈속의 내가 막 울었다? 잘한 것도 없지만. 너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어. 좋은 사람이랑 행복하라는 네 말이 너무 아팠어. 민희는 다 정리했구나. 나한테도 정리하라고 나온 거구나, 어렴풋이 알았지.
그거 나 혼자 착각한 거지? 그게 아니라면 왜 매일 카페에 들렀어? 왜 맨날 우리 같이 앉던 자리에 혼자 앉았어? 혹시라도 니가 다시 올까 봐 카페 주변을 서성이려고 하면 우리가 맨날 앉던 자리에 네가 너무 잘 보여서 매일 도망쳤어. 도망치는 길에도 너랑 같이 봤던 트리가 그때보다 더 화려하게 세워져 있더라. 집에 도착해서 매일 펑펑 울었어. 내가 정말... 비겁해서. 강민희가 보고 싶어서.
그래서 편지를 카페 그 자리에서 쓰고 있어. 오늘 하루 종일 맑다길래 아침에 우산도 안 챙기고 나왔는데 지금은 눈이 많이 내리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면 집에서 핫초코 마시면서 바깥 구경 하자던 약속 기억나? 눈 오면 신나하던 널 보는 재미로 눈이 좋아졌는데. 이제는 눈이 싫고 그래.
며칠 간 카페에 들르지 않는 널 확인하고 온 거라 그런지 갑자기 네가 여길 오진 않을까 걱정되네. 얼굴 보고는 못 전해 줄 것 같아. 아직 기억나는 너네 집 우편함에 넣어 놓고 갈게. 혹시나 이 편지가 불편하다면 무시해 줘. 아니라면, 민희도 나랑 같았다면 답은 너 스스로가 알고 있을 것 같아.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