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스팔트 도로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햇빛을 잠깐만 쐬게 해도 아이스크림에서 방울이 떨어질 만큼 날이 너무 더웠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온몸에 주르륵 흐르는 날씨에 길거리에는 아무도 돌아다니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길거리 위에 딱 한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손에는 벗은 하복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쥔 채 뛰느라 가빠진 숨을 가다듬으며 걷고 있는 송형준이었다.
숨을 어느정도 가다듬고 옷과 손을 내려다 보니 꼴이 말이 아니였다. 급하게 자리를 벗어나느라 헐레벌떡 뛴 덕분에 하복과 흰 티는 이미 땀범벅이 되어있었고 다른 손에 쥐고있던 아이스크림은 이미 다 녹아버려서 막대밖에 남지 않았다. 윽 이거 초코인데.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펼쳐보니 손바닥은 이미 초코와 끈적임 범벅이었다. 가방도 들고 오지 않은 마당에 지금 당장 이 손을 닦을 방법은 어디 건물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들어가는 건물마다 화장실은 꽁꽁 잠겨있었고 결국 송형준은 카페 비번을 알기 위해 아무 카페에 들어가 눈물을 머금으며 주머니에 남아있던 오천원으로 레몬에이드를 시키고 겨우 화장실 비번을 얻어 찝찝한 손을 씻어낼 수 있었다.
급하게 손을 씻기 위해 들어온 카페는 에어컨을 세게 틀지 않는지 생각보다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음료만 받고 나갈까 하다가 그래도 저 푹푹 찌는 바깥보다는 여기가 낫다 생각하며 송형준은 그냥 카페 구석 자리 하나를 차지해 앉았다. 카페 밖 아스팔트 도로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걸 멍하니 구경하고 있자 주문했던 레몬에이드가 나왔다. 아무 생각없이 물 마시는 것처럼 쭉 빨아들였다가 송형준은 뿜을 뻔한 레몬에이드를 뿜지 않게 막 씻고 나온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화장실 비밀번호를 위해 피같은 오천원과 맞바꾼 레몬에이드는 정말로 너무너무 시고 너무너무 맛이 없었다. 내가 집에서 수제로 만들어도 이것보다는 맛있겠다. 그래도 자기 돈 주고 산거라 끝까지 먹어보려 시도했지만 반밖에 마시지 못하고 결국 터덜거리며 카페를 나와야했다.
당장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까 도망치면서 두고 간 가방이 생각났다. 혹시나 마주칠까 싶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도착한 가방을 두고 온 공원에는 송형준의 가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아무래도 강민희가 들고 가버린 모양이었다. 미치겠네. 핸드폰도 가방에 있는데. 사라진 강민희을 찾을 방안이 없자 머리를 긁적이던 송형준은 이내 땀에 젖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강민희 때문에 오늘 하루 흘린 땀과 돈을 생각하니 몸이 오늘 날씨보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예전이었으면 그냥 가만히 앉아서 시원하게 아이스크림이나 기다리고 있었을텐데. 15살 이후로 바뀌어버린, 땀이나 뻘뻘 흘리고 있는 이 상황이 오늘 처음으로 너무 밉고 속상하게 느껴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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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의 송형준의 주변에는 사람이 참 많았다. 유치원이란 공간에서 벗어나 학교에 들어가고 주변인들과의 교류가 늘어나고 활동 반경이 넓어지면서 사람들은 송형준에게 관심을 가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송형준의 외모가 주변인들과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 것이었다. 원래 어린아이들의 눈이 진실하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꼬꼬마들도 호감을 표하고 친해지고 싶어 아무말이나 건네보고 싶어 줄을 설 정도로 송형준은 정말 귀여웠었다. 갓난아기들이 울음도 그치고 눈도 못 뗄 정도였으니 뭐 게임 끝이었다. 그리고 대왕 곰돌이 인형과 같이 놔두어도 비등한 송형준의 귀여운 외모는 어린 아이들뿐만 끌어당기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 애기야. 이름이 뭐야? 너 진짜 귀엽다."
"누나야가 사탕 줄까? 아니면 초콜릿 먹을래? 응?"
"미니가 낯선 사람이 주는거 함부로 받아먹지 말랬는데."
"꺅, 미니래. 말하는 것도 어쩜 이렇게 귀엽지??"
"미니가 누구야? 친구? 아니면 강아지?"
놀이터에서 놀 때는 동갑이거나 자기보다 어린 아기들이 달라붙었다면 공원 벤치나 슈퍼 앞에 앉아있을 때는 고등학생에서 대학생 정도 되는 누나들이 송형준의 주변을 채웠다. 맨날 축구하고 놀이터에서 논다고 어두워진 피부에 앞니는 하나 없고 늘 체육복 바지에 반팔티만 입고 다니는 또래 아이들과 달리 새하얀 피부에 옷입히기 게임을 좋아하는 누나들 덕분에 늘 인형같은 코디를 하고 자리에 앉아있는 송형준은 가만히 있어도 지나가는 누나들의 심장을 아프게 만들었다.
어린 송형준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싫어하거나 밀어내지 않았다. 내가 인기가 많은걸 어떡해. 오히려 자기가 감수해야한다는 태도를 보이며 다가온 사람들에게 마음은 내주지 않아도 하나하나 다 받아주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그런 송형준을 보며 걱정했다. 겉보기에는 교우관계에 문제가 없어보였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송형준은 아이들에게 생긋 웃어주기만 할 뿐 그 이상으로는 발전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관심을 가져 주는건 좋지만 형준의 주변에 형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다가가면 괜히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 형준을 혼자 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24시간 형준과 늘 붙어있을수는 없는 노릇. 그러다 송형준의 부모님은 해결방법을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찾아냈다.
"어머. 그러고보니 입가에 뭐가 묻어있네? 이걸로 닦을래?"
"야, 송형준!!"
주변에 꼬이는 사람들 덕분에 늘어가는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준 해결방안은 강민희였다. 우리의 해결사 강민희. 송형준과 5살 때 어린이집에서 처음 만나 8살 초등학교까지 같이 입학한 강민희는 송형준을 참 좋아했다. 어느 정도로 좋아했냐면 18살이 된 아직까지도 엄마들의 수다거리에 오를 정도였다. 어린이집에서 처음 만난 날, 상대가 엄마일지라도 먹을 것은 죽어도 안 나누어주던 고집쟁이 5살 꼬마아이가 “야, 너 기엽다. 이거 먹어“ 하며 제 간식을 다 송형준의 손에 쥐여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간식 바구니를 끌고와 송형준에게 주려 하다가 여러번 제지 당했고 수업 중에는 시선도 못떼고 화장실까지 졸졸 따라다녔단다. 하원길에는 송형준이랑 떨어지기 싫다고 펑펑 울어대며 형준의 팔 한 쪽을 꼭 잡은 채 옷을 눈물 범벅으로 만들어 엄마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초인적인 힘을 쓰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강민희와 같이 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벗어나려 하지도 않고 그냥 포기했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있는 송형준을 보며 두 엄마들은 매우 당황했다. 거기다 강민희가 끌려가는 중에 송형준을 덜 놓은 채 바닥을 한 번 굴렀고 잡혀있던 송형준도 갑작스럽게 바닥에 굴려졌다. 결국 바닥에 있는 돌에 쓸려 볼에 생채기가 난데다 갑자기 바닥을 구르며 놀래버린 송형준은 울음을 터뜨렸고 그제야 강민희는 떼 쓰며 우는 것을 멈추고 멍하니 엄마 품에 이끌려 갔다. 그 난장판 속에서 엄마들은 서로 죄송하다고 연락처를 교환하며 헤어졌고 이렇게 사건이 종결되는 줄 알았으나 그 날 저녁 송형준이 보고싶다고 또 징징거리던 강민희는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그렇게 떼 쓰는건 아니라며 부모님께 꽤나 오래 된통 혼나야했다.
다음 날에도 어린이집에서 강민희는 어제와 같이 송형준을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따라다니기만 할 뿐, 소란을 일으키거나 하진 않았고 오히려 할 말이 있다는 듯 쭈뼛거리며 조용히 따라다녔다. 강민희가 저를 따라다닌다는 것을 송형준은 알았지만 어제 바닥을 구른 일로 단단히 삐져있었기에 눈길도 주지 않았고 강민희는 어린이집에 있는 내내 송형준과 한마디도 나눌 수 없었다. 결국 송형준에게 인사든 사과든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못한 강민희는 울 것 같은 표정에 입술을 쭉 내민 채 신발장에서 송형준의 옆에 앉아 하원을 기다렸다. 이윽고 형준의 엄마가 오시며 송형준은 하원하고 강민희는 여전히 엄마를 기다려야하자 강민희는 마지막 어필이라도 하듯 송형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형준은 끝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엄마 손을 잡고 나갔고 강민희는 속상함에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자, 이거 너 먹어.”
강민희의 앞에 우뚝 선 송형준은 강민희에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건네주었다. 잘못 잘려서 반쪽이 홀랑 날아가버린 조그마한 막대 아이스크림 하나였다. 머뭇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받아든 강민희는 송형준의 눈치를 보며 한입 베어물었다. 반이 댕강 날아가버리긴 했지만 5살 아이가 한입에 먹기에는 큰 아이스크림은 강민희의 입을 초코범벅으로 만들었고 초코범벅의 강민희는 이내 울음을 터뜨리며 송형준을 끌어안았다. 형준아. 미안해. 앞으로는 떼 안 쓸게. 우느라 끅끅거리면서도 강민희는 자신이 하루종일 쫓아다니며 전하려 했던 말을 전했고 이번에는 송형준은 강민희를 밀어내지 않았다. 포기했다는 듯한 해탈한 표정이 아닌 또렷한 눈으로 잠시 강민희를 응시하다 자신도 강민희를 안아주었다. 그러자 강민희의 목청이 더 커지며 송형준의 품을 파고 들었다. 울보와 인기쟁이 꼬꼬마들의 첫 우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아이스크림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우정 속에는 아이스크림이 빠지지 않았다. 맑은 날에 한 개, 비오는 날에 한 개, 둘이서 싸우면 화해하자고 한 개, 둘 중 한명이라도 기분이 좋지 않으면 기분 풀자고 한 개. 그리고 그 아이스크림의 주 제공자는 강민희였다. 이정도로 매일 사오면 엄마에게 혼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민희는 매일 아이스크림을 사왔지만 송형준은 우정의 그 날 이후로는 거의 열손가락에도 안 들 정도로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둘이 매일 앉아서 노는 벤치에 가만히 앉아 강민희가 아이스크림을 사올 때 까지 기다리곤 했다. 오늘도 강민희는 둘이서 먹을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왔고 송형준은 강민희를 기다리다 누나들에게 둘러싸인 일상의 날이었다.
"저기 교복입은 누나. 학교에서 그러는데 손수건은 세탁 자주 안하면 더럽대요. 형준이 몸도 약하구 소중해서 함부로 손수건 대면 안돼요."
"어? 어..."
"그리구 머리 긴 누나? 형준이 눈이 예쁘긴 하지만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얘도 부끄러워해요. 그리구 먹을거는 여기 아이스크림 있어서 괜찮아요."
"아...그래..."
"그럼 누나들 잘가요~."
"그..그래, 안녕.. 귀여운 애기도 안녕..!"
송형준은 병균 가득한 손수건을 댄다고 목숨이 위험할 만큼 몸이 약하지도 않았고 낯선 사람과 말을 잘 섞지 않을 뿐 크게 부끄럼 타는 성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송형준은 사람을 잘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걸 아는 강민희는 누군가 부탁하지도 않았지만 자신이 자처하여 언제나 거짓말로 능숙하게 형준에게 다가오는 곤란한 사람들을 대신 거절해주었다. 그래도 오늘은 두 명밖에 없었네. 저번에는 5명이였잖아. 웅. 자 여기 쮸쮸바. 이렇게 3년을 보내온 두 사람은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다는 듯이 강민희는 송형준의 옆에 앉아 손 쉽게 아이스크림을 따주었다.
"미니야."
"응?"
"넌 언제까지 내 아이스크림 따줄꺼야?"
"언제까지? 몰라?"
"그럼 앞으로 어른 될때까지 내 아이스크림 따줘. 엄마는 자꾸 스스로 따라면서 아이스크림 안 따줘."
송형준은 강민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원래 생각없이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다. 거의 쓸데 없는 말이 대부분인데다가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얼마나의 영향력을 펼치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직접 책임지는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아마 그 당시의 송형준도 어린 또래의 아이들처럼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을 것이다.
"어른될 때까지? 아니야. 평생 따줄께!"
"진짜?"
"대신 형아라고 한번만 불러주면 안돼?"
"싫어."
"아, 왜!!"
하지만 강민희는 언제나 송형준에 대해서만큼은 늘 진지하게 임했고 송형준과 관련된 것은 한 치의 거짓없이 행동하였다. 그리고 평생 아이스크림을 따주겠다는 말을 정말 지키는 듯 송형준이 스스로 아이스크림을 딸 수 있게 되어 자신이 스스로 딸려 하여도 강민희는 늘 한 발 빠르게 나서 송형준의 아이스크림을 따주었다. 아이스크림을 받아드는 송형준은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고 감사의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정말 그 행동에 일말의 감정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연하던 행동은 15살이 시작되며 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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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들어서면서 송형준은 스스로의 돈을 내며 먹을 것을 사먹기 시작했고 두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빈도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부모님께 직접 용돈을 타서 쓰기 시작하면서 아이스크림을 맨날 사먹는다는 것은 학생에게 얼마나 큰 사치인지 깨닫게 되었고 성장기를 겪기 시작하다보니 달디 단 아이스크림보다는 피자빵 같이 배를 든든히 채우는 것이 더 끌렸다. 또 입맛도 고급져졌다고 슈퍼에 파는 500원 짜리는 아깝게 느껴지면서 베라에서 파는 몇천원 짜리 아이스크림은 아까워하지 않고 사먹고 싶어했다.
그렇다고 500원 짜리도 안 사먹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피씨방에 가고 베라를 사먹고 빵을 사먹을 돈을 쪼개고 쪼개어서 어떻게든 500원을 남겼고 둘은 날이 덥든 춥든 매주 일요일마다 만나 그 500원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벚꽃잎 흩날리던 15살의 그 날도 둘이 따로 약속시간을 전한것도 아니지만 언제나 모이는 시간에 모여 동네 슈퍼로 향했다. 강민희는 오렌지맛을 송형준은 소다맛을 하나씩 집어들어 계산을 한 뒤 주변 공원 벤치에 앉았다. 송형준은 언제나 그랬 듯 강민희가 따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고 앉아있었다. 하지만 강민희는 사 온 아이스크림에 입도 대지 않고 할 말이 있어보이는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형준아."
"응?"
"나 좋아하는 사람 있다."
송형준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쿨럭거렸다. 강민희가 이렇게 갑작스럽고 뜬금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밝힐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있는지도 몰랐다. 누구지? 언제부터 좋아한거지? 강민희와 하루종일 붙어사는 송형준의 기억 속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민희가 좋아할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쟤 주변의 여자사람이라고는 우리 누나들과 같은 반 여자애들 밖에 없는데. 안그래도 최근 들어서 여자애들한테 고백도 받기 시작하더니 그 때 눈이라도 맞은걸까. 언제부터 자신도 모르게 혼자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온걸까. 뭐랄까. 송형준은 지금 이 순간이 강민희가 저 모르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분 나빴다.
"같은 학교이긴한데 너는 잘 모를꺼야. 그냥 복도에서 보고 첫눈에 반했거든. 귀엽게 생겼어."
"..."
"그런데 오늘 복도에서 다른 남자애랑 손잡고 가더라. 나 고백도 못하고 차인거겠지?"
"..."
"그런걸까. 형준아?"
"어. 차였어."
어떡하지. 형준아. 나 생각보다 많이 그 애 좋아하나봐. 기분이 나빠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하였지만 강민희는 아랑곳 않고 어떡하냐며 송형준에게 안겨왔다. 안그래도 더운데 강민희가 안겨오자 몸이 더 더워졌다. 짜증이 늘어가는 것 같아 송형준은 강민희를 떼어내려 했지만 강민희의 얼굴을 보자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강민희는 울고 있었다. 강민희는 정말 진심으로 그 아이를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강민희가 고개를 떨구자 뜨거운 눈물이 다리에 방울방울 떨어지는게 느껴지고 숙인 고개 밑에서 훌쩍이며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강민희를 토닥여주자 강민희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오기 시작했고 그 울음소리는 송형준의 마음을 꽤나 아프게 파고 들었다. 마음 속은 씁쓸함으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꼭 자신이 차인 것 처럼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하지만 지금의 송형준이 강민희에게 해줄 수 있는것이라고는 강민희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달래어주는 것 뿐이었다. 울음소리가 점점 사그라들고 고개를 들자 우느라 붉어진 강민희의 볼에는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속상한 것이 다 풀리기라도 했는지 강민희는 볼의 눈물 한 방울을 제외하고는 울었던 흔적도 없이 차분하게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멀쩡한 표정이더라도 강민희의 속은 말이 아닐 것을 알기에 송형준은 볼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살짝 닦아준 뒤 아무 말 없이 강민희의 손목을 잡고 이끌어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힘내라고 한마디라도 던져줄까 하다가 강민희가 살짝 웃으며 고맙다 말하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자 순간 숨이 턱 막혀 차마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송형준은 30분 전까지만 해도 강민희가 눈물을 쏟아내던 벤치로 다시 돌아왔다. 혹시나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앉았을까 했지만 강민희는 우느라 송형준은 그런 강민희를 달래느라 떨어뜨렸던 아이스크림을 제외하고는 자리를 비웠던 순간 그대로 벤치는 비워져있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혼자 벤치에 앉은 송형준은 하루를 회상했다. 강민희의 짝사랑 고백부터 자신의 앞에서 울자 난생 처음 느낀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감정, 그리고 강민희의 눈물 젖은 얼굴까지. 강민희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손가락 끝에 닿았던 따뜻한 촉감을 떠올리자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쿵쿵거리는게 들리기 시작했다. 겨우 심장소리를 가라앉히고 송형준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송형준은 자신 앞에 주어진 상황에 대해 빠르게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편이였다. 생각 정리를 마친 송형준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5살 때부터 시작된 10년 우정의 친구 강민희는 송형준의 첫사랑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좋아해왔을지도 모른다. 그랬다 할지라도 송형준은 15살 봄이 되어서야, 이제서야 제대로 제 마음을 자각했다. 선선한 봄바람 사이로 볼이 달아오르는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아이스크림 하나는 더 먹어야할 것 같았다.
강민희는 첫사랑이 무너져 눈물을 흘릴 때 송형준에게서는 첫사랑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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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거하게 앓은 것 같던 강민희는 전 날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평소처럼 웃고 장난기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런 강민희의 모습을 보며 송형준은 전 날의 일이 꿈 같다고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강민희가 사랑에 힘들어 하는 모습을 내비칠수록 강민희를 사랑하는 송형준은 그 모습을 보고 아파할수밖에 없으니까. 다행히도 강민희는 그 이후로 3년이 흐르는 동안 사랑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더 이상 내비치지 않았다. 첫사랑을 차인 얘라고는 믿기지 않을정도로 여전히 종종 다른 이들에게 고백을 받아왔고 심지어 송형준이 보는 앞에서 받기까지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송형준은 심장이 순간 멎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강민희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고 늘 송형준의 옆에 있어주었다.
하지만 강민희가 새 사랑을 시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옆에 있는 송형준이 언제까지나 안심하고 맘편히 있을수는 없었다. 강민희의 옆에 있으면서 포커페이스를 짓는데 익숙해졌을 뿐, 자신의 눈 앞에서 고백 받는 강민희를 보면 볼수록 송형준의 심장이 가라앉는 기분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강민희의 옆에 서서 강민희가 그 고백을 거절하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자신의 손 끝을 잡고 이끄는 강민희를 보며 송형준은 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강민희의 첫사랑이라는 아이는 이미 강민희의 마음 속 깊숙히 자리해버서 새로운 사랑은 커녕 고백을 전하는 소리조차도 비집고 들어올 자리도 없을 거라고. 그 상대가 설령 송형준이 되더라도 강민희는 그럴 것이었다.
그렇다고 송형준은 강민희의 첫사랑을 이겨주겠어 같은 오기를 부리며 강민희에게 자신의 맘을 고백하려고 하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용기가 나지 않는 탓도 있었지만 송형준은 강민희라는 사람을 제 곁에서 잃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고백을 하게 되더라도 부모님께 연애는 어른되서라는 말을 귀아프게 들어왔기에 송형준은 19살 졸업하고 강민희와 같이 성숙한 어른이 되었을 때 고백하고 꼭 입 맞추리라 마음 먹었었다. 사람을 깊이 신뢰하지 않는 송형준은 첫사랑이자 짝사랑 3년동안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거나 고민상담을 요청하지 않았다. 언제나 송형준의 고민상담을 들어주던 사람은 강민희였지만 그 고민의 대상이 강민희가 되자 고민상담을 할 사람이 없어져버렸던 것이다. 아니 10년 우정 3년 짝사랑의 시간을 같이 보낸 강민희와 쌓은 신뢰와 믿음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었던 것이었다.
봄이 지나 여름이 오고 짝사랑의 시간도 3년이 조금 넘었다. 송형준이 이런 짝사랑은 익숙하다 못해 평생 할 수도 있겠다 생각할 정도로 참으로 오래도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지났어도 바뀌지 않은게 있었다. 하나는 강민희를 향한 송형준의 짝사랑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주일에 한 번 가지던 두 사람의 아이스크림 타임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용돈이 늘어나면서 일상의 소소한 사치를 부릴 수 있게 된 두 사람은 이제 일주일에 한 번 비싼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소소한 아이스크림을 먹고싶은 두 사람이었었다. 그렇게 늘 만났던 슈퍼로 이동하던 중 송형준은 문득 옛날 생각이 하나 스쳐지나갔다.
"강민희. 내 가방 받아. 오늘꺼는 내가 살께. 먼저 벤치에 가 있어라."
"엉? 야 잠깐만 송형준!"
"5분만에 사갈께!"
뒤에서 강민희가 소리치는게 들렸지만 무시하고 슈퍼까지 냅다 달렸다. 갑자기 강민희가 매일 아이스크림을 사다주던 옛날 일이 왜 떠올랐는지 송형준은 몰랐다. 하지만 그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 송형준은 오늘은 자신이 강민희에게 사주어야겠다는 생각에 강하게 꽂혔다. 그렇게 도착한 슈퍼에서 5분만에 돌아가겠다던 송형준은 아이스크림을 고르는데만 15분을 쓰고도 계속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동안 강민희가 사다준 맛이 한두개였어야 말이지. 저건 저번 주에 먹었고 저건 맛없다고 했었다. 한참을 고민하느라고 더운 열기에 제 땀방울이 손등에 떨어지는 것도 모르던 송형준은 아직도 안 골랐냐는 슈퍼 주인의 물음을 듣고서야 겨우 하나를 골랐다.
그래도 남고딩 둘이서 먹는데 쌍쌍바 하나는 너무 심했나. 비닐을 뜯고 반으로 쪼개기 위해 막대를 양 손으로 잡은 송형준은 잠시 갸웃거렸다. 하지만 정말 고심 끝에 고른 아이스크림이었다. 십 몇년 밖에 살지 않았지만 강민희와 송형준 두 사람의 인생에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었고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온 이후로는 한번도 사먹은 적이 없었기에 오랜만에 이걸로 추억 감상이나 해야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 집어오기도 했다. 슈퍼에서 나와 공원으로 향해가니 저 멀리서도 강민희의 동글한 뒷통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서 빨리 나눠먹어야지. 송형준은 인상까지 찌푸려가며 아이스크림을 나누는데 열중했고 완벽히 반으로 갈라내자 딱 벤치까지 스무걸음 남은 위치에 도착했다.자신을 기다렸을 강민희를 부르기 위해 송형준은 고개를 들었다.
벤치 앞의 강민희는 다른 누군가와 웃고 있었다.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강민희보다 작고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은 걸 보니 또래쯤 되는 여자인 것 같았다. 평소였다면 심장이 가라앉는 느낌을 무시한 채 강민희 오늘도 고백 받았구나하고 아무렇지 않게 다가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송형준의 머릿 속은 빠르게 식었고 심장은 그 무엇보다 빠르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강민희가 웃고 있었다. 강민희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정말 가끔씩 송형준에게 스치듯 보여주었던 미소였다. 제 첫사랑을 얘기할 때와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송형준에게 스치듯이 보여주었던 미소. 강민희는 그때의 사랑에 빠진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왼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리자 강민희가 고개를 들어 송형준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강민희의 입꼬리가 더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송형준은 그걸 보지 못했다.
오른손에 남은 아이스크림을 쥔 채 그 자리에서 도망쳐버렸다. 제 손에서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던 것도 모른 채.
그렇게 도망쳐버렸지만 송형준은 제 발로 강민희를 찾아야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사주고 싶은 마음은 꾹 누르고 그냥 각자 사먹을걸 그랬었다. 핸드폰도 없이 강민희를 찾아다니며 송형준은 자기자신을 자책했다. 3년동안 제 마음을 참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는데. 보통 사랑은 당사자 빼고 남들은 다 알아차린다고 하지만 3년동안 그 누구고 형준아 너 민희 좋아하지 하고 말 걸어온 적이 없었다. 그렇게 잘 숨겨왔는데 너무 오랜만에 보는 강민희의 사랑에 빠진 모습에 마음을 숨기겠답시고 그 자리에서 도망쳐버렸다. 강민희를 찾았을 때 강민희 성격에 절대 그냥 넘어 갈 일이 없었고 그 상황에서 도망친거에 대해 둘러댈 거리를 생각하니 머릿 속이 복잡해졌다. 그냥 가방만 받고 다시 도망치던가 해야겠다. 송형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핸드폰이 없으니 연락할 방법이 없어 강민희와 자주 가던 곳이란 곳은 다 찾아다녔다. 오늘 갈 날은 아니지만 혹시 몰라 학원에도 방문했다가 단어 재시험 안 친게 들키고 어제 갔던 피씨방에도 가보았지만 강민희는 없었다. 그렇게 강민희를 찾아 돌아다니다 겨우 강민희를 목격한 반 친구들을 만나 강민희의 행방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강민희 찾으려고 이렇게 땀흘린 적이 있었나. 강민희가 집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을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1층 엘리베이터에 고장이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송형준은 머리를 한번 쓸어넘겼다. 강민희집..18층.. 3년 짝사랑도 이리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동안 편하게 지냈으니 지금부터라도 힘들라고 하는 것 같았다.
한여름에 아파트 계단을 18층이나 올라가는 것은 인생에서 하면 안되는 미친 짓이라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송형준은 왼쪽 허벅지를 주먹으로 찍어대며 초인종을 눌렀다. 곧 문이 열리고 안에서는 시원한 바람과 눈이 휘둥그레진 강민희가 나왔다. 아마 땀에 젖은 송형준을 보고 그렇게 눈이 커진 것이었을것이다. 이내 강민희는 송형준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집 안으로 끌어당겼고 가방만 받고 도망칠려던 송형준은 그대로 멍하니 끌려와 정신을 차려보니 호랑이 소굴 안으로 들어와있었다. 침착하게 굴고는 있었지만 집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거실 쇼파로까지 끌려가며 송형준은 자신의 눈만큼은 침착하게 굴지 못하고 또륵거리며 돌려댔다.
"엘리베이터 고장이였는데 여기까지 걸어올라온거야?"
"웅.."
"내가 나중에 너희집에 가방 가져다줄려고 했었는데. 힘들게 왜 여기까지 올라왔냐."
아. 얼음 가지고 올께. 기다려봐. 강민희는 얼음물과 수건을 가져와 얼음물은 송형준의 손에 쥐어주고 수건으로 송형준의 머리와 얼굴을 닦아주었다. 강민희는 수건에 가려 보지 못했겠지만 송형준의 눈과 심장은 멈추지 않고 볼이 점점 달아오르는게 느껴졌다. 이리 줘 내가 닦을께. 결국 송형준은 강민희의 손에서 수건을 뺏어 얼굴을 닦는 척하며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3년동안 강민희 앞에서 잘만 써왔던 포커페이스가 오늘따라 연달아 무너지고 있었다. 좀 진정되었다 싶었지만 송형준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강민희에게 수건을 건내고 얼음물을 급하게 들이켰다.
"그런데. 형준아. 너 아까 공원에서 왜 도망간거야?"
"어??내가???"
"물 천천히 마시고. 아이스크림까지 떨어뜨리고 헐레벌떡 뛰어갔잖아."
"어...그게... 네가 고백 받는 것 같아보이길래.. 자리 피해준거야!! 그런..거야.."
"거짓말. 너 내가 고백 받아도 신경 안쓴다는 표정으로 항상 옆에서 다 듣고 있었잖아. 그런데 오늘 이렇게 갑자기 도망친다고?"
아니, 뭐 하루정도는 친구 위해서 빠져줄수도 있는거지. 뭘 그렇게 의심하고 추궁을 하냐... 예전에 강민희가 안 어울리게 형준아~하며 나긋나긋하게 부르자 정색 지어준 적이 있었는데 강민희는 그 때의 간질간질한 목소리로 송형준을 점점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아까처럼 도망칠까 했지만 아직 강민희에게 가방도 받지 못한데다 냅다 뛴다하더라도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강민희에게 붙잡힐게 뻔했다. 어떻게 할 방안이 없었다. 송형준은 완전 독 안에 든 쥐였고 이대로 거짓말을 계속해 상황에서 벗어나거나 제 마음을 밝히고 상황을 싸늘하게 만들거나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송형준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애꿎은 컵만 손톱으로 긁어댔다.
"송형준. 네 볼 지금 엄청 빨간거 알아? 너 원래 아무리 더워도 얼굴은 안 빨개져."
“어..그게...”
“그게?”
"네가 네 첫사랑이랑 얘기하고 있길래 도망쳤어!! 됬어?"
"..뭐?"
"그 자리에서 도망쳤던 것도 네가 너무 행복한 표정으로 네 첫사랑 같아보이는 애랑 얘기하는 것 같아서였고. 그래, 나 원래 더워도 얼굴 안 빨개져. 지금 얼굴 빨간 것도 너 때문이야."
결국 송형준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쳐버렸다.애초에 고백할 계획도 없었지만 3년동안 짝사랑하면서 언젠가 고백하더라도 이렇게 고백하게 될거라고는 단 한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있는 공간에는 그저 마음을 가라 앉히는 송형준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이 순간이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럽고 가방이고 뭐고 당장 자리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미안해 못 들은걸로 해줘. 나 갈께. 송형준은 제대로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벗어나려했다. 하지만 이내 강민희에게 손목이 붙들려 더 나아기지 못했다.
송형준 나 봐봐. 강민희의 손에 이끌려 몸이 돌려지는게 느껴졌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점점 급격하게 뛰어오는 심장소리로 송형준의 머릿 속이 어지럽혀졌다. 송형준 정말 나 안볼꺼야? 강민희는 계속해서 송형준을 불러왔다. 더 이상 뭘 할 수도 없었던 송형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 강민희와 눈이 마주치자 송형준은 멍해졌다. 강민희가 웃고 있었다. 평소에 짓는 가벼운 미소가 아니었다. 제 첫사랑을 향해 지어주던,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송형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아까 내가 누구랑 얘기하는거 보고 오해해서 도망친거야?"
"...."
"아, 진짜 송형준 귀여워 죽겠다. 걔 우리 중학교 동창이잖아. 그 단발머리 기억 안 나?"
"단발머리..? 아...설마 걔??"
"그래. 걔가 오랜만에 만났다면서 연애는 하고 사냐길래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대답해주고 있었단 말야."
"아...그래서 첫사랑 대답해주고 있었구나."
"아니? 나 15살 이후로 첫사랑 접었어. 지금은 다른 사람 좋아해."
송형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른 사람? 이미 15살에 첫사랑을 접었다니. 그럼 이제껏 그 환한 미소를 짓게 만들고 그 미소를 대상은 누구였던거지. 기억을 되짚던 송형준은 입을 틀어막았다. 3년동안 강민희가 송형준을 혼란스럽게 만들던 그 미소를 지어주던 대상은 송형준밖에 없었다. 이제서야 다 알겠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강민희는 입꼬리를 스륵 올리더니 송형준을 끌어안았다. 송형준을 가둔 품 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송형준은 자신의 심장소리가 격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격해져오는 심장소리는 강민희도 마찬가지였다. 강민희의 품에 고개를 파뭍은 송형준은 입을 열었다.
"있지. 민희야. 강민희. 그러니까..내가 진짜 20살까지 고백 참을려고 했거든? 연애는 커서 하는거라고 들어왔으니까. 그렇게 믿고 계속 참아왔는데..그랬는데...지금 말해야 될거같아."
좋아해. 민희야. 그 무엇보다도 많이.
나도 좋아해. 형준아. 그 무엇보다도 깊게.
한참을 끌어안던 두 사람은 포옹을 풀고 잠시 눈을 맞추었다. 하지만 3초도 채 채우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고백한건 좋은데 멘트 오글거려 강민희. 뭐래 나 너 똑같이 따라한거야.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투닥거리다 웃다가 서로의 고백이 어땠니 하며 지적하기 바빴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3년만에 두 사람의 마음이 맞닿았다.
"아, 너무 덥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좋아."
"그럼 무슨 맛 가져다줄까?"
"아, 아니야. 아이스크림 먹기전에 다른거부터 먹을래."
"그게 뭔데?"
송형준은 자신의 발꿈치를 살짝 들어 강민희와 자신의 얼굴이 최대한 비슷한 위치에 놓이게 했다. 그리고는 강민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잠시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을 공유하고 떨어진 송형준은 살짝 웃어보였다.
곧 강민희도 입을 맞추어왔다. 송형준의 입맞춤 보다는 더 길고 따뜻하고 조금은 끈적하기도 한 입맞춤이었다.
키스라는 단어가 맛으로 존재한다면 그 맛은 누구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그 어느것보다 달고 중독되는 맛일 것이다.
지금 강민희와 송형준은 자신들이 먹어온 아이스크림보다 달고 중독되는 이 맛을 처음으로 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맛은 어린 두 사람에게 너무 달아서
두 사람을 오랫동안 떼어놓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