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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이 세계에는 달이 붉은빛으로 변할 때 모든 왕국이 한자리에 모여 예언자의 예언을 듣는 날, 예언의 날이 존재했다. 예언은 전쟁, 혼약, 재난 등 어떤 내용일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1XXX년 4월 14일, 붉은 달이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모든 왕국이 한자리에 모여 예언자의 예언을 기다렸다. 예언자는 짧고 명료하게 한 문장만을 말하고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태양과 거품이 붉은 실로 이어져있다."


 

태양의 왕국 헬리오스와 거품의 왕국 아프로스의 예언이었다. 수많은 해석이 있었지만 붉은 실은 운명을 의미한다는 공통된 의견에 헬리오스 왕국의 자식과 아프로스 왕국 자식은 태어나기 전부터 정략결혼을 맺는다. 그 둘이 동성 일지어도 두 왕국은 정략결혼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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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에 헬리오스 왕국과 아프로스 왕국에서 황태자가 태어났다. 예언의 날 예언 때문에 이 둘은 태어나기 전부터 정략결혼을 맺었고 결혼 적정 기인 18살이 되기 전까지 서로의 이름, 목소리, 얼굴조차 알 수 없었다. 둘은 어린 나이 때부터 예절 교육과 각 왕국의 문화를 배워갔다. 둘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둘이 17살이 되던 해에 아프로스 왕국의 황제와 황후는 결혼식 날짜를 정하기 위해 헬리오스 왕국으로 향했다. 당사자인 황태자 역시 가야 하기에 형준은 오랜만의 외출을 준비했다. 그렇게 도착한 아프로스 왕국은 형준의 눈길을 이끌었다. 아프로스 왕국의 황제, 황후, 황태자와 헬리오스 왕국의 황제, 황후가 모였지만 헬리오스 왕국 황태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형준은 모처럼 황태자를 볼 수 있나 기대했었지만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은 황태자에 서운한 티를 팍팍 냈다. 다시 아프로스 왕국으로 돌아가기까지 반나절이 남자 형준은 황제와 황후에게 성을 돌아보는 것을 부탁했다. 황제는 흔쾌히 허락했고 형준은 성의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정원을 구경하던 도중 공원 풀숲 주변에서 개구멍을 발견했고 개구멍을 통과한 형준은 그곳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잠을 자고 있는 소년을 발견한다.


 

멀리서 봐도 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가 형준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때 소년이 뒤척이며 잠에서 깼고 형준은 잠에서 깬 소년과 눈이 마주쳤고 정신을 차린 후 재빨리 개구멍을 통해 도망갔다. 형준은 빠른 걸음으로 정원에서 벗어났고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저 사람이 내 결혼 상대였으면 좋겠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1월 22일, 둘의 결혼식이 다가왔다. 헬리오스 왕국이 아프로스 왕국보다 강대국이었기에 결혼식은 헬리오스 왕국에서 이루어졌다.


 

형준은 왕국으로 가는 길 내내 이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황태자를 상상했다. 듬직한 분일까, 다정한 분일까 아님 냉철하신 분일까. 그때 형준의 머릿속에 들어온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오늘은.. 못 만나겠지. 전에 정원 뒤 공간에서 마주친 그 사람을 생각하며 형준은 흔들거리는 마차에서 잠을 청했다. 황태자끼리 결혼하는 사례가 역사에 없진 않았지만 아주 극소수에 해당됐다. 남자끼리는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 고아를 입양하거나 대리모를 고용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형준은 저 역시 아이를 그렇게 가져야 한다는 사실에 자신을 닮은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씁쓸했다.



 

"황태자,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하녀들을 따라 이동하세요. 준비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린답니다."

"네 어머니."



 

형준은 황후의 조언을 새겨들으며 결심했다. 오늘은 울지 말아야지. 뭐만 하면 뚝뚝 눈물을 흘리던 형준은 오늘만큼은 울어선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마차가 헬리오스 왕국에 도착했고 형준은 하녀들을 따라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방에는 오늘 자신이 입을 옷과 걸칠 장신구들이 가득했다. 전체적으로 하얀 옷감에 아프로스 왕국의 대표인 하늘색과 간간이 붙혀져 있는 진주는 형준의 결혼식에서 빛이 날 예정이었다. 화려한 장신구는 무시하고 브로치를 찬 형준은 옷과 세트인 구두를 신었다.


 

아직 결혼식까지 시간이 조금 남자 형준은 창문에 걸 터 앉아 창밖을 구경했다. 창밖으로는 1년 전에 왔을 때 소년과 만났던 정원이 보였다. 그 소년, 옷차림이 귀족인 것 같던데 오늘 결혼식에 올까? 형준이 소년을 생각하고 있을 때 하녀는 이제 나가야 한다며 형준을 불렀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형준은 어릴 때부터 이 정략결혼을 위해 해온 고생이 끝난다는 것에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허무함을 느꼈다. 보통 결혼식에서는 남자가 입장 후 여가 입장하지만 오늘 결혼하는 둘은 남자였기에 함께 입장을 한다.


 

먼저 도착한 형준은 곧 있으면 만나게 될 황태자에 괜히 심장이 뛰었다. 형준이 구두 끝만 보며 기다리고 있을 때 형준의 시야에 자신의 옆에 스는 검은색 구두가 들어왔다. 형준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형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헬리오스 왕국의 대표 빨간색과 루비를 포인트로 한 검정 옷을 입고 있는 황태자는 형준이 오늘 꼭 만나고 싶어 한 그 소년이었다. 황태자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형준에 시선을 살짝 피하며 입꼬리를 싱긋 올렸다. 형준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황태자에게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 전 아프로스 왕국 황태자 송형준이에요."

"헬리오스 왕국 황태자 강민희입니다."



 

짧게 통성명한 형준은 지금 자신의 손에서 홍수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민희는 절대 모르리라 생각했다. 18년 동안 준비한 결혼식은 단 1시간 만에 끝이 났고 형준은 손에 나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고선 무도회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결혼식 옷보다 조금 더 화려하게 프릴이 간간이 달려있는 옷을 입은 형준은 아까 전 결혼식에서의 민희를 상상했다. 저보다 10cm는 훌쩍 크고 다리가 길쭉길쭉하고 훤칠한 외모를 가진 민희가 제 결혼 상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형준이 있던 방으로 황제, 형준의 아버지가 들어왔다. 아버지. 드디어 이 결혼식이 끝났구나. 수고했다. 형준은 진심이 느껴지는 황제의 말에 말없이 황제를 안았고 황제 역시 형준의 등을 토닥이며 형준의 결혼을 축하했다. 무도회 시작 시간이 다 되어 가자 형준과 황제는 함께 무도회장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길에 만난 황후 역시 형준의 결혼을 축하했고 형준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띠었다. 결혼식 후 열리는 무도회는 다양한 왕국의 귀족들이 오며 결혼식의 주인공들이 춤을 추는 시간도 존재했다. 형준은 이미 어릴 때부터 주구장창 연습해오던 춤이었기에 춤실력을 걱정하진 않았지만 민희와 함께 춘다는 사실이 형준을 떨게 만들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 다들 마음껏 즐겨주십시오."



 

헬리오스 왕국 황제의 말로 무도회가 시작이 됐고 형준은 그저 주변만 둘러보며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만 조물조물 만질 뿐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바삐 교육을 받아온 형준은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었다. 살짝 툭 튀어나온 입술이 형준의 기분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자 화들짝 놀란 형준이 뒤를 돌아봤다. 같이 춤 추시죠. 형준의 어깨를 건드린 누군가는 민희였고 같이 춤 추자는 말에 형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새 노래는 익숙한 노래로 바뀌어 연주되고 있었다.



 

"형준 씨가 저랑 동갑이라고 들었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 얘긴 듣지 못한 것 같네요."

"무도회 끝나면 같이 바람이라도 쐐죠."

"ㄴ,네. 좋아요.."



 

민희의 리드로 춤은 끝이 났고 민희는 곧이어 자신을 부르는 귀족들에 형준에게 양해를 구하고선 자리를 떠났다. 형준 역시 자리를 옮겨 테라스 쪽으로 이동했다. 밤이라 그런지 불어오는 잔잔한 시원한 바람은 형준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형준은 민희의 애프터 신청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형준이 테라스 난간에서 턱을 괜 채 멍 때리고 있을 때 민희가 형준의 곁에 다가왔다. 민희의 두 손에는 샴페인 잔이 들려져 있었고 민희는 형준에게 한 잔을 내밀었다.


 

여기서 혼자 뭐 하십니까? 민희의 나근나근한 음성이 형준의 귀를 녹였다. 그냥.. 시원해서요. 형준의 대답에 민희는 피식 웃었고 샴페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를 본 형준 역시 샴페인 잔에 입을 댔다. 그냥 지금 나갑시다. 민희는 샴페인을 원 샷 했고 형준이 대답할 틈도 안 주고 형준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형준은 손에 들린 샴페인 잔을 급하게 난간 위에 두고 민희를 따라갔다.



 

"어딜 가는 겁니까, 황태자!"

"형준 씨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오겠습니다!"

"황태자!"



 

민희는 자신을 부르는 황후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형준과 함께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민희가 향한 곳은 헬리오스 왕국의 정원이었다. 꽃이 예쁘지 않습니까, 다 제가 고른 꽃들입니다. 이 정원은 민희 씨 정원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어릴 때부터 교육 때문에 힘들어하던 저를 위해 황제 폐하가 마련해주신 공간입니다. 민희의 자랑 아닌 자랑에 형준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저 이곳에 온 적 있어요.



 

"작년 결혼식 날짜를 정하던 날 황제, 황후폐하와 함께 왔었는데 황태자께서 참석하지 않으셔서 조금은 실망했었어요. 아프로스 왕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시간이 꽤 남아 왕국을 구경할 때 잠깐 왔었어요."

"역시 그때 제가 만났던 소년이 형준 씨였군요."

".. 저를 기억하시나요?"



 

민희는 예쁜 보조개를 만들며 웃었다. 형준은 자신을 기억하는 민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민희는 형준을 개구멍으로 이끌었고 형준은 오랜만에 보는 개구멍이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민희는 반짝이는 눈으로 개구멍을 바라보는 형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에 형준은 얼음처럼 굳어버렸고 민희는 그런 형준이 귀엽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저도 그날 원래 참석했어야 했지만 흔들의자를 타면서 책을 읽다 보니 잠이 솔솔 왔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 있었는데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서 눈을 떠보니 처음 보는 소년이 저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더군요. 그 소년은 황급히 개구멍을 통해 빠져나갔지만 저는 그 소년의 생김새를 모두 이미 본 후였습니다."

"아.. 그랬구나.."

"그 소년이 형준 씨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좋습니다."

"저도 좋아요. 민희 씨랑 결혼하게 된 거요. 민희 씨도.. 저를 떠올렸나요?"



 

형준의 질문에 띄는 민희의 미소는 달빛에 비춰 빛났다. 민희는 아무 말 없이 형준의 손을 잡았다. 형준은 자신의 손을 감싸오는 따뜻한 온기에 미소 지었다. 저는 그날 만난 소년을 잊지 못해 오늘 헬리오스 왕국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도 소년을 생각했어요. 오늘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 소년이 제 결혼 상대이라는 걸 알고 나서 깜짝 놀랐어요. 형준의 말에 민희는 형준을 따뜻한 눈빛으로 내려봤다. 그런 민희의 눈빛이 부끄러운 형준은 그런 자신을 복숭앗빛 뺨으로 나타냈다.



 

"저 역시 그 소년을 항상 생각했습니다. 딱 한순간 마주친 소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끌렸습니다. 감정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던 저는 제가 그 소년에게 느끼던 감정이 대수롭지 않은 평범한 감정인 줄 알았는데 오늘 그 소년을 만나보니 평범한 감정은 아닌 것 같군요."

"저와 같은 감정을 느끼신 것 같네요. 이 감정의 명칭은 잘 모르겠지만 좋은 감정이라는 건 알겠어요."



 

달빛 아래 두 소년은 서로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붉은 실로 묶여있던 소년들은 이제서야 제 운명을 만난 셈이다. 서로를 만나기 위한 준비는 그들의 감정을 서툴게 만들었다. 미성숙한 그들에게 찾아온 미성숙한 감정은 그들에게 큰 의미가 되지 않았다. 그저 서로라서 좋은 두 소년에게 미성숙이라는 단어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디딤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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